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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바 Apr 05. 2024

결혼 9년 차 13번째 이사

말레이시아 정착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

지난 결혼 생활 9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사연 많은 가족이랄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기러기 생활을 청산하고 주말 부부로 지내다가 세 가족이 말레이시아 쿠칭으로 이사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이사를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이주를 할 때마다 1년을 채 못 살고 이사를 다녔다.


우리 집은 봄이 오지 않았다


2013년.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구옥빌라. 우리는 신혼집을 구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집 문제가 생겼다. 추운 겨울이었다. 보름 만에 결로현상으로 벽에는 곰팡이가 생겼고 보일러를 틀어도 바닥이 군데군데만 따뜻했다. 집안 온기는 차디찼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청바지가 차가웠고 집안에서 입김도 나왔다. 전세금을 돌려받고 옆 동네로 이사 갔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중앙난방에서 개별난방으로 바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 개월 후에 보일러 공사를 시작했다. 집안 바닥을 땅굴처럼 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유난히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왔다. 하지만 우리 집은 봄이 오지 않았다. 이 힘든 시간은 임신 5개월 차부터 시작해서 그 사이에 아들은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집은 찬물만 나왔고 바퀴벌레가 득실거렸고 보일러 공사로 먼지가 날렸으며 주변에도 보일러 공사 소리로 시끄러웠다. 도저히 신생아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만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지냈다. 우리는 강제 주말 부부가 되었다. 우리 집과 친정집의 거리는 왕복 4시간. 남편 회사는 신혼집 근처였다. 여전히 보일러 공사는 진행되었다. 신생아를 키우면 절대적으로 잠이 부족해진다. 친정 식구들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남편이 옆에 있었으면 했다. 나에게 행복한 신혼 생활은 사치였다. 또다시 전세금을 돌려받고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는 아름답지 않았다


2015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주도는 아름다웠다. 돌 갓 지난 아들을 데리고 전 지역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발품 팔았다. 전세금으로 게스트하우스를 하려고 연세로 집을 계약했다. 연세는 제주도에만 있는 주택 임대차 계약 형태로 월세와 전세와는 달리 1년 치의 월세를 한꺼번에 낸다. 게스트하우스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알바도 하고 커피 바리스타도 배웠다. 우리가 고생했던 시간은 즐거웠다. 어느 날 갑자기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 났다.


가슴 떨리는 전화 한 통.

 

"여보세요! 구급대원입니다. 남편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00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분명 나는 30분 전에 남편과 통화를 했었다. 정신 차리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은 어디 있어요? 아들은 괜찮나요?"


집에서 병원까지 40분. 택시 타고 병원 가는 길은 걱정되고 불안해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간호사 품에서 울고 있었던 아들. 먼저 아들을 안고 진정시켜 주었다. 신이 있다면 아들을 구해주신 게 분명하다. 외상이 하나도 없었다. 신발 한 짝만 없어졌다. 반면 남편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쳤다.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갔다. 믿기지 않았다. 남편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다. 남편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단 살자고. 살아야만 한다고.


남편은 뒷자리 카시트에 아들을 태우고 집에 오고 있었다. 집 근처 3분 거리. 큰 도로가 아닌 일 차선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길거리에는 시시티브이도 없었다. 우리 차도 상대 차도 블랙박스가 없었다. 상대차와 부딪히면서 남편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과도하게 꺾었다. 상대 차에 있는 사람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하루하루 마음 졸이면서 살았다. 신은 우리를 두 번 살려 주었다. 중환자실에서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옮기고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퇴원하고 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남은 건 교통사고 트라우마.


살림살이를 모두 처분하고 남은 전세금으로 필리핀으로 떠났다.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마음은 달랐다


2015년.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자'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당장 필리핀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트라우마를 잊고 살기에 좋았다. 필리핀에서 집도 구하고 남편 일자리도 구하고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신상 보호를 위해 차마 말할 수 없지만 그 일이 생기고 나서 나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스물일곱 살 이후로 우울증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은 이때부터였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 가이드 일이 괜찮을 줄 알았다. 현실은 그 반대였다. 나를 막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다 떠나서 네 살이었던 아들을 하루종일 *야야한테 맡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야야는 툭하면 안 나오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무작정 야야가 당장 일을 그만두겠다고 해서 나는 일하는 도중에 집에 달려가기도 했다. 몸도 정신도 종이 쪼가리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처음에는 필리핀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 하루라도 지내기 싫었다. 한국 교민도 필리핀 현지인도 여행을 오는 관광객도 점점 보기가 힘들어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야야: 필리핀에서는 베이시비터를 '야야'라고 부른다.


심리적 안전기지는 말레이시아


2018년 ~ 2022월 8월. 5년이 넘는 기간은 말레이시아 두 번의 정착을 실패하고 갈 곳이 없어서 다시 한국이나 필리핀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여행 가이드는 혼자서 먹고살기에 충분하다. 외벌이로 세 식구가 먹고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마이너스 생활로 살았다. 나는 '월세 값만이라도 벌어보자' 이 마음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나와 소통하고 지냈던 유튜버들이 영상이 뜨고 나서 구독자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익을 얻고 더 나아가 작가로 강연자로 자신의 직업을 더 확장시켰다. 나도 N잡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유튜브 시작은 말레이시아에서 했다. 또다시 필리핀으로 이주하고 1년 반 동안 구독자 3,500명으로 한 달에 십만 원이나 두 달에 십만 원 정도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다른 유튜버과 다르게 나는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때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힘든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뭘 해도 다 안 되는 것 같았다. 유튜브 채널을 삭제하고 나도 나를 삭제시켰다. 심해 바다 어느 중간에서 사경을 헤맸다.


연속으로 나에게 힘든 일이 생겨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희망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희망을 버리니 죽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생을 버틸 힘이 없었다. 한국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집안일, 아들 챙기기, 나를 씻는 일까지.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매일 울부짖었다. 눈빛이 흐리멍텅했다. 그러다가 심리 상담 센터를 방문하면서 알게 된 내 우울증의 원인. 원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대인관계와 사회생활 등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도 필리핀도 그 어디에서도 마음 둘 곳이 없었는데 말레이시아는 달랐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만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심리학 용어로 심리적 안정기지라는 말이 있다. 심리적 안정기지는 내가 마음속으로 힘들 때 내가 도피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결혼 9년 차 13번째 이사


2013년 ~ 2015년

1. 수원에서 수원으로 이사

2. 수원에서 제주도로 이사

3. 제주도에서 필리핀으로 이사


2015년 ~ 2018년

4. 필리핀에서 친정집으로 이사

5. 친정집에서 말레이시아로 이사

6. 말레이시아에서 필리핀으로 이사

7. 필리핀에서 친정집으로 이사


2018년 ~ 2023년 7월

8. 친정집에서 말레이시아로 이사

9. 말레이시아에서 인천으로 이사

10. 인천에서 친정집으로 이사

11. 친정집에서 시댁집으로 이사

12. 시댁집에서 말레이시아로 이사

13. 쿠알라룸푸르에서 쿠칭으로 이사  


우리는 결혼 9년 차에 13번째 이사를 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쿠칭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드디어 우리 세 식구는 웃을 수 있다. 우리 집에도 봄이 찾아왔다.  

2015년. 제주도로 이사
2018년. 첫 번째 말레이시아 정착 실패하고 필리핀으로 이사
2020년. 두 번째 말레이시아 정착 실패하고 한국으로 이사
2023년 7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쿠칭으로 13번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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