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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바 May 01. 2024

어쩌다 단 둘이 보드카를 마셨더니

자꾸만 커지는 내 마음

우리 같이 걸을래요?


이집트 다합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다합의 길거리도, 스쿠버다이빙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도,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는 매일 게임에서 졌다. 여전히 설거지는 내 담당이었다. 처음과 다르게 설거지도 능숙해졌다. 준 강사를 좋아하면서부터 설거지마저 즐거웠다.  


"나 설거지 다했어~ 다들 빨리 와~"


다 같이 보드카를 마시기로 한 날이다. 공용거실 탁자에 여러 명이 둘러앉았다. 편하게 술 한잔 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시끌벅적한 소리에 준 강사도 1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나와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아쉽지만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를 보는 척 안 보는 척,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로 가득 찼다. 


'나는 밝고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


준 강사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평소보다 더 밝게 웃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무릇 익어갔다. 맥주만 마시다가 보드카를 마시니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뜨거워진 내 볼을 만졌다. 이대로 계속 마시다가 취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바람을 쑀다. 얼마 안 돼서 준 강사도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왜 여기에 앉아 있어요?"

"술 좀 깨고 싶어서 나왔어요. 강사님은 어디 가요?"

"다들 술이 좀 모자란 것 같아서 더 사려고 나왔어요"

"근데 왜 강사님 혼자가요?"

"저도 술 좀 깰 겸 사 온다고 했죠"


그날따라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우리 같이 걸어요"


그렇게 우리는 다합의 밤바다를 보며 걸었다. 한 달 동안 단 둘이 있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쫄깃해졌다. 혹시 그와 손이라도 닿을까 봐 살짝 거리를 두었다. 어색한 공기. 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우리의 정적은 파도 소리로 채워졌다. 


'라이트하우스의 거리는 왜 이렇게 짧을 걸까'


내가 먼저 같이 걷자고 했지만 어떠한 말도 못 하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동전지갑의 주인이 되고 싶어


우리는 술자리를 다시 즐겼다. 이제 보드카 한 병이 남았다. 사람들은 한 두 명씩 취해서 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다. 바닷가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한 나 자신이 답답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한다.


"괜찮으면 저랑 더 마실래요?"

"아쉬웠는데 저야 좋죠!"

(단 둘이라니... 말도 안 돼)


숨이 막혔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와 술자리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어쩌다 단 둘이 보드카를 더 마셨다. 서로 마주 보니 다시 떨렸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다시 놓칠 수 없었다. 술기운을 빌려 첫 입을 뗐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다합에서 여자친구 사귈 생각 있어요?"

"....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뭐...."

(아, 괜히 물어봤나? 없다고 하면 어쩌지?)


그는 대답도 신중했다.


"정말 마음에 들면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 아...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나도 모르게 내 속마음을 말할 뻔했다.


"OO씨는 남자친구 없어요?"

"네. 남자친구 사귀고 싶은데 없네요"

"근데 왜 남자친구가 없어요?"

"뭐... 있었는데 헤어졌죠"

"아... 그렇군요"


또다시 찾아온 정적. 어색할 때마다 술잔을 부딪혔다.


"저는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줄려고 미리 동전지갑 사다 놨어요"

"네? 동전지갑이요? 어디서요?"

"이집트에서 사막 투어할 때, 일본 여행객들이 동전지갑을 팔길래 예뻐서 샀어요"

"아니~ 그래도 여자친구가 없는데 어떻게 줄 생각하면서 샀어요?"

"지갑 모양이 귀여운데 제가 갖기에는 좀 그렇고, 여자친구 생기면 주는 게 낫겠다 싶었죠"

(생각보다 순수한 모습도 있구나~ 귀엽다)


그를 알아갈수록 매력이 넘쳐흘렀다.


우리의 취중진담


어느새 보드카는 바닥이 보였다. 우리는 더 깊은 대화로 이어갔다.


"강사님은 한국에 안 간지 오래됐겠네요?"

"그렇죠. 이제 1년 정도 되었으니까요"

"한국이 안 그리우세요?"

"그립긴 하죠. 하지만 아직은 가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왜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조금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보여)

"저도 답답한 마음 때문에 일단 세계여행을 시작했어요"

"그렇군요. 가끔 OO씨를 보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부분에서요?"

"저는 직장 다닐 때 길을 잃은 기분이었거든요. 퇴사하고 혼자 이집트 생활하면서 저를 알게 돼서 기뻤어요. 지난번에 OO씨도 다이빙 강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했잖아요. 그 모습이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답답해서 한국을 떠난 것도 비슷하잖아요.

"강사님이 워낙 말이 없어서 그런 생각한 줄 몰랐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우리가 비슷해서 더 끌렸던 걸까)


"강사님은 다합에서 혼자 안 외로웠어요?"  

"지내봐서 알겠지만 계속 사람들이 다이빙하러 와서 외롭다는 거 몰랐어요. 근데 장기간 동안 머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게 되면서 많이 아쉬웠던 것 같아요. 다 떠나고 혼자 남겨졌을 때 외로움을 느꼈죠"

"아.. 진짜... 그럴 수 있겠네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 힘든 마음이 있을 줄은..."


그가 나에게 벽을 만든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안쓰러웠다. 내가 그 사람 옆에서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이 분위기라면 내 마음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요즘에 결혼이 하고 싶어요"

"지금 몇 살이죠?"

"스물여덟이요"

"아... 결혼하기에 아직 이른 나이 아닌가요?"

"그렇죠. 튀르키예 여행하면서 신랑신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요. 강사님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한 적 있어요?"

"글쎄요... 결혼은 생각한 적이 없지만 뭐... 언젠가는 하겠죠?"

(다행이다. 그래도 비혼주의는 아니구나)

"그럼 강사님은 아이 좋아하세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어? 저도요! 결혼은 하고 싶은데 딩크족으로 살고 싶거든요"

"그래요? 딩크족? 저도 아이 낳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여기 있다. 나와 가치관이 맞는 사람)

"저와 같네요. 혼자 여행하면서 생각해 봤는데요. 결혼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도 서로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고 싶어요"

"저도 그런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어렵기만 하네요"


알 수 없는 이끌림. 대화를 할수록 자꾸만 그에 대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에게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으로 꾹꾹 눌렀다. 이 남자를 놓치기 싫었다. 섣부른 고백을 하면 그가 도망갈 것 같았다. 그날 새벽까지 우리는 처음으로 진짜 마음을 나누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 진짜 사랑이다.

나는 그 동전지갑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마음으로 대신하는 말. 그 남자와 진짜 사랑이 하고 싶어.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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