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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바 May 06. 2024

오늘 밤 너에게 고백하게 될 줄이야

나에게 기회가 왔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다합 게스트하우스 2층의 분위기는 1층과 사뭇 달랐다. 1층은 여행객들이 지내는 곳이고 2층은 강사나 다이브 마스터가 지내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강사와 마스터는 공용거실에 모였다. 그날따라 분위기가 무거웠다. 민(가명) 강사는 준 강사가 진행하는 다이빙 교육에 대해 아쉬운 점을 말했다. 침묵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민 강사는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서야 1층으로 내려갔다.


'표정이 슬퍼 보여. 괜찮은 걸까'


잠시 뒤 그도 문을 열고 나갔다. 슬픈 표정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도 그를 따라서 신발을 신었다. 축 처진 어깨가 보였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저도 같이 올라가도 될까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다시 내려갈게요"

"네. 올라와도 괜찮아요"

"그럼, 제가 맥주 좀 가지고 올게요"


속상한 마음을 맥주로 위로해주고 싶었다. 맥주 캔을 따서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강사 생활이 쉽지만은 않네요"

"힘내세요. 저한테는 훌륭한 강사였는 걸요"

"그렇게 말해주니 위로가 되네요. 마스터 과정하면서 어려운 점 없어요?"

"네. 아직까지는요. 처음보다 마스터 동기들이 늘어나서 그런가... 즐겁게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 거 같네요. 가끔씩 OO씨 웃음소리가 2층에서도 다 들렸을 정도였으니까요"

"아 진짜요? 제 웃음소리가 멀리서도 잘 들린다고 자주 듣긴 했어요"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우리는 단차에 앉아서 맥주 한 모금씩 마셨다.

오늘 밤 너에게 고백할 거야

출처: 픽사베이


별똥별은 내 소원을 들어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다합의 밤하늘. 그 풍경과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지금이 고백할 수 있는 기회야. 용기를 내야만 해'

 

내 몸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돌렸다.


"강사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저 강사님 좋아해요. 강사님이 저 다이빙 교육했을 때부터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답도 신중했다. 어렵게 입을 뗐다.


"아... 최근에 지영(가명) 누나가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제가 눈치를 좀 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방금 OO씨였다는 걸 알게 돼서 조금 놀랬어요"


"아... 그럼, 제 고백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게요. 부담 갖지 말고 들어주세요. 강사님이 저 다이빙 슈트 처음 입혀 줬을 때 첫눈에 반했어요. 그 이후로 계속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죠. 그런 강사님이 멋있었고 귀여웠고 순수했어요. 강사님이 어디에 있든 강사님 밖에 안 보였어요. 제가 다이빙 강사를 하겠다는 것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취소한 것도, 제 머리를 잘라달라고 한 것도, 제가 강사님 방으로 옮긴 것도, 다 강사님이 좋아서 그랬어요. 어쩌다 단 둘이 보드카를 마신 날에 깨달았죠. 저와 비슷한 이유로 이집트에 온 것부터 결혼에 대한 가치관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사님이 외롭지 않게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강사님을 좋아한 지 한 달 정도 됐어요. 최대한 강사님 앞에서는 좋아하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두려웠어요. 제 짝사랑이 이대로 끝나버릴까 봐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잡고 있던 맥주 캔을 꽉 움켜쥐었다. 늘 짝사랑에 대한 끝맺음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고백에 대한 거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싫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강사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때마침 비처럼 우수수 별똥별이 떨어졌다. 속으로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좋다고 해. 제발'


또다시 찾아온 정적.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에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차분한 성격이다 보니까 그런 밝음에 한 번씩 눈길이 갔던 것 같아요. OO씨가 웃으면 저도 괜스레 같이 웃게 되더라고요. 먼저 고백을 해줘서 제 마음을 알게 되었어요. 단발머리로 잘라준 그날,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게 좋아하는 마음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보통 반대가 끌린다고 하잖아요.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말은 제 마음을 받아주신다는 거죠?"

"네. 우리 사귀어요"


2013년 7월 15일, 별똥별은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나와 같은 마음일까?

출처: 픽사베이


뒤에서 그를 안아 버렸다


짝사랑이 사랑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어깨가 조금 더 닿도록 가까이 앉았다. 그의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강사님! 우리 같이 말 놔요"

"아무래도 그게 더 편하겠죠?"

"오빠~ 오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어~"

"조금 어색하지만 좋긴 좋네~"

"오빠가 내 남자친구라니... 아직도 꿈만 같아"

"꿈 아니야~ 여자친구를 사귄 지 오래돼서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 잊어버린 것 같아"

"오래되면 뭐 어때~ 지금 이렇게 나랑 같이 있으면 된 거지~ 안 그래?"

"그렇네. 오늘 고백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서 좋아"

"나도 좋아.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건가?"

"그렇지? 아직 자정은 안 넘었으니까?"  


우리는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아! 맞다. 보드카 마실 때까지만 해도 네가 여자친구가 될 줄 몰랐는데... 여자친구가 생겼으니까 있다가 동전지갑 선물로 줄게"

"진짜? 고마워~ 오빠가 그 얘기했을 때 순수해서 더 반했잖아~"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야~ 언젠가는 여자친구 생기겠지 하고 산 건데, 진짜 생길 줄은 몰랐어"

"처음이라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우리의 운명은 그때 정해졌을지도 몰라. 전에 피라미드만 보고 바로 다합으로 왔다고 말했었잖아~ 다합에는 스쿠버다이빙이 아니라 오빠를 만나려고 온 것 같아. 주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빠에게 다가가기 어려웠을 거야. 모든 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다 맞아떨어졌어. 마치 하늘은 우리가 연인이 된다는 걸 아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듣고 보니 그렇네. 우리는 왜 한국이 아닌 이국에서 만나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난다더니, 이 말이 딱 맞는 말이었네~"

"신기하다. 그렇지?"

"응~ 신기해~"


우리는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까지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다합이라서 용기를 더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먼저 옥상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에 뒤에서 그를 안아 버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서도 떨림이 느껴졌다. 그의 온기는 따뜻했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려가서 어떻게 얼굴을 보려고 그래'


나는 2층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내 인생 최고의 여름날이었다.

너와 나, 사랑하게 됐어

출처: 픽사베이


그 남자의 마음

이건 설마... 이후 그가 몰랐던 마음은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사랑이 찾아온 거야"

그 남자에게 동전지갑을 받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취향마저도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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