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 추가/ 유연성 최고
엄마는 책을 읽어주었다.
결혼하고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 하나밖에 없는 낯선 도시에서 나에게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도서관이었다. 우리가 정착한 도시는 어린이 도서관이 잘 되어있었다. 첫째와 둘째가 아기 때부터 업고 안고, 유모차에 태우거나 조금 커서는 2인용 자전거에 태워 다녔다. 아기들 독후 활동 프로그램도 주마다 신청해서 책과 친분을 다졌다. 집에 오는 길에는 20여 권의 책을 빌려와 바닥에 늘어놓고 그날은 잔치와 같이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골라 먹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독서를 시작했다. 지금은 책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저희들이 국어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이 나오는 이유를 아이들도 어렴풋이 안다. 3, 4학년쯤 핸드폰을 접하면서 영상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책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따스한 감정은 평생을 따라다닐 거다. 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걸 안다. 나도 그랬다. 10대에 읽은 책들이 내가 되어 30년을 쉬고도 내 안에 남아있어 다시 독서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한 때의 푸릇한 기억은 마룻바닥 가장 아래쪽에 숨겨져 있다 때가 되면 들춰지기도 한다. 그걸 믿는다.
아이들의 관심사를 파악한다.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을 때면 아이들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게 되는데 그럼 자연스레 책꽂이에 있는 만화책이나 잡지 같은 것을 꺼내 본다. 잠깐 읽기 좋은 책을 아이들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배치하는 것은 엄마가 할 일이다. 아이들이 한창 책을 읽을 때는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가장 관심 있고 재밌어하는 책을 골라 다음번에도 비슷한 종류로 책을 빌려왔다. 아이들이 관심 있어하는 책은 주저하지 않고 주문했다. 그렇게 꾸준히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었다. 부모란 아이들의 관심사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안 한지도 꽤 되었다. 일한다 바쁘다 핑계만 대고 쯧. 이제 아이들의 관심사는 저희들이 알아서 고른다. 유튜브에서 다 찾을 수 있을 줄 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 줄 모르고.
잠자기 전 각자 책을 읽는다.
셋째 달복이와 넷째 복실이는 아직도 책을 종종 읽는다. 긴 글 짧은 글을 가리지 않는다. 만화를 가장 좋아하기는 한다. 달복이와 복실이는 큰 아이들보다 책 읽어주기를 오래 못해줬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책을 읽었고 셋째, 넷째는 자신들이 책 읽기를 선호했다. 그리고 엄마가 읽으면 조용히 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건 아이들의 성향 차이라 생각했다. 독후 활동 할 시간도 크게 없어 그저 책을 읽고 나도 읽었다. 그렇게 잠자리 독서는 한 동안 이어지다 흐지부지 아이들이 커가면서 없어졌다. 이제는 책 보는 엄마 옆에서 복실이가 옆에서 책을 읽는다. 그건 책을 읽는다기 보다 엄마의 온기가 그리워서 그런 것이다. 엄마는 하루 종일 뭘 하느라 바쁜지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없다. 잠자기 전 잠깐 아이와 붙어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각자의 책을 읽는다.
일하는 중에도 책을 읽어준다.
방학을 맞아 가게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마의 주방 옆에 따로 마련된 아이들의 공간. 자영업을 하는 부모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자녀 양육의 또 다른 공간이다. 지난겨울 복층으로 공간을 구분해 놓았다. 아래층은 식사와 게임, 독서의 공간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게임을 허락해 준다. 그러나 엄마가 바쁠 때면 게임을 하든 동영상을 보든 제발 소리 지르며 싸우지만 말라고 빌어본다. 바쁘지 않은 시간 엄마는 오랜만에 꼬마 둘을 모셔두고 책을 읽었다. 엄마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꽃들에게 희망을>. 노란 책, 애벌레 이야기다. 달복이는 오랜만에 엄마가 읽어주는 책이 좋은가 보다. 엄마가 옆에서 들려주는 목소리가 좋은 걸까. 전날 책을 읽은 복실이가 자꾸 스포를 하자 입을 막아버린다.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방학 생활을 즐기고 있다. 책 읽은 것만은 좋았다. 10분 여쯤 될까? 그 외는 각자 알아서 재미있게 논다. 아이들의 방학은 즐겁다. 놀거리,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기사님 기능 추가
아이들 학원 차량 기사일이 추가되었다. 달복이가 발을 다치는 바람에 왕복 주부 기사로 변신해야만 했다. 발을 다친 달복이는 방학 시작과 함께 열이 났다. 안 그래도 비쩍 마른 얼굴이 허옇게 떴다.
마감을 하고 부랴부랴 할머니 집에 맡긴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복실이는 감기 기운이 있는 오빠 때분에 할머니 집에서 못 잔다며 50분을 울었다. 힘이 없어 잠자코 지켜보며 기다리다 집으로 가는 차에 모두 태웠다.
엄마는 언제나 맛있는 요리사
시간 맞춰 밥을 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되었다. 방학 맞이 첫날 야심 차게 준비한 주부의 요리는 고기 볶음. 이번 고기는 팩에 양념이 되어 들어 있는 것이다. 온갖 야채를 넣고 푹 끓이기만 하면 된다. 모두 좁은 공간에 모여 고기 냄새를 맡았다. 거센 환풍기를 틀어 놓으니 에어컨이 별 소용없었다. 아빠에게 가서 선풍기를 가져와 돌렸다. 주부 혼자 쐬니 시원하였다. 오래 끓이는 음식은 하지 말기로 하자.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빠르게 끓일 수 있는 빡작장을 끓였다. 냉동에 얼려둔 호박, 양파, 파를 한번 먹을 양만큼 봉지에 싸서 얼려 두었다. 냄비에 넣고 물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감자만 썰어 넣으면 끝이다. 수프처럼 야채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끓인다. 먹기 5분 전에 된장, 고춧가루, 두부, 고추를 잘게 썰어 넣는다. 이것은 된장 맛이 아니라 야채 국물 맛이 우러나는 게 중요한가 보다. 성공이다. 짜지 않고 심심한 것이 만족스럽다. 온 가족이 모두 맛있단다. 당분간 매일 빡작장이다.
방학이 시작되며 새로운 기능이 몇 가지 더 추가되었다. 그건 꼭 방학이라 그런 것은 아니고 때때로 추가되거나 제외되기도 한다. 엄마라는 역할은 심지가 굳건해야 하지만 또 이렇게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 무슨 기능이 추가되거나 빠지더라도 적응이 가능하다. 모든 역할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엄마가 또 할 일이 있으니 그건 방학 숙제다. 왜 평소에는 숙제가 없다가 방학만 되면 숙제를 내줄까. 그냥 아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주시면 좋을 텐데.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지만 스스로 과제물 종이를 챙기기가 힘들다. 하루에 한 번씩 숙제 안내장을 잃어버리고 찾느라 난장판을 벌인다. 아~~ 내 딸. 숙제는 알아서 좀 안 해가고 그래야지. 방학 첫날부터 매일 마다 엄마를 들볶는다. 오빠들 좀 배워라. 오빠들은 알아서 안 하는 기본형들이잖니. 세상 피곤하게 좀 살지 말자. 피아노 치는 동영상은 매일 보내는 것이 아니란다. 한 번만 촬영해서 보내면 된다니까. 선생님이 세세하게 적어 주지 않아 네가 뭘 모르는가 본데! 하~~~ 야밤에 피아노를 치는 걸 찍어달라는 아이. 어제도 오늘도 피아노 촬영을 못해서 못 보냈다는 아이. 저녁밥도 늦었는데 당장 촬영을 하여 보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엄마는 촬영 기사가 아닌데. 엄마는 복실이의 시녀가 아닌데 왜 시녀 노릇을 못해 야단맞는 기분일까. 엄마의 한 성깔을 보여줘야 하는데 힘이 없어서 목소리가 안 나온다. 한 잠자고 나서 두고 보자.(싸움 기능도 하나 더 추가.)
엄마는 많이도 고단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감당한다. 그래서 더 대체 불가능하다.
늘 멋지다. 나야 오늘도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