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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리 알까기

불량주부 탈출기 30회 끝

by 눈항아리

메추리알 조림을 한다. 처음엔 껍질을 잘 까지 못했다. 껍질과 흰자가 붙어있기 일쑤였다. 작은 노른자만 남겨지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메추리알 삶기도 고난도 요리일까? 불량 주부에게는 늘 난코스다. 계란 프라이와 같이 메추리알 삶기도 간단하지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을 언제 전수받았느냐. 바로 지금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뭐든 대충 닥치는 대로 하는 불량 주부는 그 간단한 것조차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메추리알이 잘 삶아져도 껍질을 벗길 때가 문제다 노른자가 한쪽으로 몰려 하얀 오토바이모자를 쓴 녀석이 되기가 쉬웠다. 어느 날은 그런 녀석들만 모아 단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나마 이번에는 양호한 수준이다. 개중에 멀쩡한 녀석들도 있다. 깨끗하고 말끔하게 까서 팩에 편리하게도 나오던데 그건 질겨서 맛이 없다. 불량하면서 까탈스럽기까지 한 그녀는 손수 메추리알을 삶은 다음 깐다. 그래도 오늘은 껍질이 까지니 다행이다.


중간 냄비에 삶아 국그릇에 찬물을 담가놓고 껍질을 깠다. 다 까고 나니 밥그릇 하나로 양이 줄었다. 까면서 부서진 알 몇 개를 먹은 것인가. 대체. 반찬통에 담고 끓인 간장물을 부었다. 간장 국물을 깔끔하게 한다고 조린 야채는 건져내고 까만 국물만 쪼르르 따랐다. 반찬통을 너무 작은 것으로 골랐나? 까만 국물이 넘치려고 한다. 한강물에 떠다니는 메추리알 노른자가 볼만하다. 둥둥...


그래도 숟가락으로 한 알 담으니 맛나 보인다. 맛은 메추리알 조림 맛이다. 양파, 파, 고추 반 개, 마늘을 넣고 간장, 설탕, 물을 넣고 푹 끓인 간장이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메추리알 삶기 주의사항>

메추리알이 냉장 보관되었다면 실온에 두어 찬기를 충분히 없앤다.

물을 붓고 소금, 식초를 넣고 끓인다.

한 방향으로 저어준다.

삶은 후 찬물 샤워를 시켜준다.

위의 주의사항을 지키면 껍질을 잘 깔 수 있을까? 다음번엔 배운 바를 실천해 봐야겠다.


불량주부의 일상은 메추리알 삶기와 매우 닮았다. 참 쉬워 보이는 메추리알 삶아 까기. 살림이란 그런 것이다. 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살림을 논하려면 메추리알을 삶아봐야 한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먹어봐야 맛을 안다. 겪어봐야 안다. 메추리알도 삶아 봐야 어려운 줄 안다. 살림도 살아봐야 안다. 그러니 노른자가 조금 보여도 괜찮다. 간장 국물에 노른자가 둥둥 떠다녀도 메추리알 조림은 메추리알 조림이다. 애초에 안 까지는 메추리알은 반찬통에 담기지도 못한다. 속사정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주부의 서투른 손길로 만든 망측한 메추리알이 반찬통에 담긴다. 조리시간 30분 이상.


매 끼니마다 주부가 요리에 투자하는 시간은 얼마일까. 때로는 팩에 든 메추리알을 사서 간장을 부으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해 본다. 시간 대비 가격을 생각해 보자면 절대 비싼 게 아닐 수 있다. 바쁜 주부들이 반찬을 사 먹는 게 그런 이유다. 시간 대비 가격.


주부는 왜 굳이 바쁜 와중에 메추리알을 삶아야 했을까. 내 시간이 무척 저렴해서? 자신의 시간을 싸구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다. 그 귀중한 시간을 한갓 메추리알에 투자하는 이유. 요리는 정성이니까. 내 식구에게 좀 더 좋은 걸 먹이고 싶으니.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시간을 요구한다. 내 생때같은 아침시간을 푹 퍼서 내주는 이유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서 그렇다.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엄마의 손맛, 사랑, 그건 시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량주부가 아침에 언제부터 그리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고! 시간은 천금과 같고 내 시간은 억만금보다 값진 법이다. ㅋㅋ


요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안 살림 곳곳에 주부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주부는 그곳에 자신의 정성을 입힌다. 짧은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내 손때를 입히자. 주부의 시간은 억만금이다! 더하여 일하는 불량주부의 시간은 더더더 값지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쥐락펴락 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간편하다. 남들은 제일 어렵다는 시간 지배하기. 주부라면 더군다나 일하는 주부라면 누구나 시간을 지배한다. 쫓기는 것 같은가? 시간이 없다고 푸념하고 있다면 우선은 시간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시간을 내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


메추리알을 삶지 않고 삶아진 것을 구매한다면 시간을 벌 것이다. 메추리알이 삶아지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한다면 시간을 몇 배는 더 값지게 쓸 것이다. 하지만 보통 메추리알 삶는 시간에 간장을 끓인다. 다른 불에서는 한강물이 된 된장국을 끓인다. 베란다에서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돌아가고 있다. 1인 다역으로 움직이는 주부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계발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간을 거스르며 쫓아가고 있다. 시간은 이미 주부의 편이다.


그러니 밥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애 말라하지 말자. 기다리시오. 쭈욱~~ 시간은 나의 편이니. 밥이 취사에서 보온이 될 때까지, 국이 다 끓을 때까지, 반찬이 반찬통에 담길 때까지 잠시 기다리시오. 미리 반찬을 준비한다면 버는 시간도 주부의 것이다. 그래서 방학인 요즘 점심, 저녁 시간을 여유롭게 활용하고 있다. 내일이 큰 아이 둘의 방학 끝 개학 시작이라는 것이 또 문제 이긴 하다. 적응할만하니 새로운 미션을 내놓는 것이 삶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것인가.


<불량주부 탈출기>는 글쓰기 책 읽기 등 자기 계발에 푹 빠진 주부의 살림 잘 살기 프로젝트였다. 회를 거듭할수록 가족의 엉망인 먹거리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라면, 가공식품을 엄청 먹는 우리 가족. 끊으려고 며칠 노력해 봤으나 라면을 주식으로 승급시키는 것이 빠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바쁘고 빠듯한 시간에 라면만 한 먹거리가 없어 때로는 고맙기도 했다.


얻은 것도 있다. 흰쌀밥 대신 밥에 잡곡을 넣어 먹게 되었다. 살아있는 야채를 끊이지 않고 밥상에 대령했다. 여드름쟁이 복이는 야채, 과일 두세 종류를 준비해 주면 하나는 꼭 먹게 되었다. 늘 버려지는 것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아이들 식성을 바꾸는 것이 하루아침에 안 되는 것이라는 것쯤은 불량주부도 안다.


가공식품과 반조리 식품을 좀 더 건강하게 먹는 법도 늘 연구하고 있다. 양념육에 온갖 야채를 넣어 끓인다. 오리훈제에 양파와 부추를 넣어 볶아 먹는다. 냉동 떡갈비를 오븐에 구울 적에는 마늘, 고추, 버섯 등을 넣고 같이 굽는다. 그리고 쌈을 싸 먹는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절실하여 대부분이 먹는 것으로 채워진 불량주부의 일상들이다. 더불어 불량 주부는 설거지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빨래는 늘 소파 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것은 빨래의 숙명으로 치부하자. 나의 숙명이 아닌 빨래의 운명이다. 집 안팎 관리는 지네의 등장과 더불어 좀 멀어지기는 했다.


의지가 있으나 상황은 늘 주부의 마음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방학이라는 시스템에 적응하니 내일 개학이 도래하는 것을 보라. 그러나 불량주부는 노력하고 있다. 메추리알을 삶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메추리알 삶는 법을 검색하여 찾아보지 않았던가. 모자란 것은 배우고 여러 번 몸에 익혀야 한다. 복이의 식습관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배움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ㅎㅎㅎ


느리게 배워도 괜찮다. 시간은 주부의 편이고 기다려주는 가족들이 있으니 괜찮다. 남편도 복이도 라면을 끊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건강을 돌보고 있다. 이번에는 운동을 해보겠단다.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이 어디에 어떤 바람을 불어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목적은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사는 것이니까 라면도 기분 좋게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하자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라면은 다시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불량주부 탈출기>를 쓰며 나는 참으로 빠듯하게 살고 있구나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한 것이 가족의 건강과 나의 건강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건 몸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안녕도 해당된다. 밥은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주부가 행복해야 맛있는 밥이 만들어진다. 주부가 건강해야 밥도 건강해진다.


불량주부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탈출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때가 되면 방학이 오고 또 더 바쁜 시절이 오면 자연스레 탈출하게 될 것이다. 매일 메추리알을 매끈하게 삶겠다는 자세로 시간을 묵묵히 지휘하며 새로운 시련을 기다리면 된다.


나에게 은근한 위안을 안겨준 많은 라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불량주부 탈출기> 끝!


가끔 멀쩡한 것도 있다.
단체사진 치즈~~!
그럭저럭 잘 삶았으나 반찬통이 작다. 넘칠라.


30회를 끝으로 <불량주부 탈출기>를 마칩니다.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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