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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Apr 12. 2024

박태기 그녀들의 수다

올해는 유독 꽃이 예쁘다. 출퇴근길 벚꽃이 유난히 흐드러지길래 남편에게 꽃이 저렇게 이뻤냐고 하니 그렇단다. 꽃은 매년 그렇게도 피었구나. 매일 수정 터널 같은 꽃길을 지나 집으로 간다. 그동안은 차가 막힐까 봐 빙 둘러 다녔던 길을 천천히 운전해 간다. 세상이 주는 선물을 받은 듯한 요즘, 안 보이던 꽃을 눈에 담고 감탄을 한다. 매일 그들에게 받는 선물이란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피어나는 과정을 보는 것. 다음 날이면 조금 더 활짝 피는 것. 다음날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것. 그 아이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피어나는 것일 뿐인데 아이들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얼굴을 보는 것처럼 내 얼굴에도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만물의 어머니인가 보다. 아줌마의 오지랖이란 이렇게 넓어지나 보다. 동네 지나다니는 아이들이 다 내 아이들 같아 보이더니 이제는 꽃에게도 엄마 노릇을 하려는 건가.


박태기


10년 세월 커피숍과 함께한 어수선한 정원. 봄이면 올라오는 파릇한 풀과 총천연색 꽃을 보고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봄 꽃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무얼까. 나이가 들어가나? 감성이 갑자기 풍부해질 수도 있나? 혹시 갱년기 증상일까? 걱정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쁨을 담기 바쁘다. 그저 즐긴다. 아이들 사진 일색이던 핸드폰 앨범이 죄다 꽃사진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다 옷도 꽃무늬를 고르는 건 아니겠지. 설마? 어제의 눈과 오늘의 눈이 다르고 내일의 눈은 또 알 수 없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으니 앞으로 꽃무늬 옷을 입은 어르신을 보더라도 촌스럽다 하지 말자.


초록 이파리에 가려져 정원 구석 어딘가에서 이름도 모르게 묻혀있던 박태기를 며칠 전 사진에 담았다. 짙은 자줏빛 알갱이는 까만 쌀알 붙여 놓은 듯 오밀조밀하다. 따뜻한 볕을 이삼일 쬐더니 그늘에서도 진한 분홍빛 꽃잎을 열었다. 아니 그녀들은 입을 열었다.


멀리서 보이지 않던 꽃. 정원석을 딛고 올라 핸드폰을 가까이 대고 엉덩이는 쭉 빼고 정성 들여 찍었더니 제법 태가 난다. 핫핑크 입술을 하고 뭐라고 저희들끼리 쫑알거리기 바쁘다. 울타리 너머 누군가 손을 살짝 내밀고선 몰래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며 수다풀이가 한창이다. 입술연지 곱게 바르고 진분홍 옷이 참 잘 어울리던 파마머리 단골손님들 수다 한마당 같다. 구수한 입담에 깔깔거리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네들의 인생사는 그늘 아래 후미진 곳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 하나 의지해 다닥다닥 붙어사는 삶이라도 화기애애하다.  

박태기

수풀에 가려져 존재감이 없던 박태기가 담장 키만큼 커진 것을 몰랐다. 주차장에 선 거대한 몸집을 한 차량에 가려져, 담장 너머 주차된 자동차에 가려져 오가는 누군가를 훔쳐보려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목을 빼 고개를 한껏 올리고도 바깥세상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태기 그녀보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빨간 장미가 온통 담장 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이 봄날 그녀들의 진분홍빛 화려한 수다만이 담장을 넘어 따스한 바람을 타고 너른 세상 구경을 간다.


나도 담장을 넘고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간다. 귀를 쫑긋 열고선 박태기 그녀와 함께 바람에 실려 간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는 동여 매고 머플러를 두르고 기다란 봄 코트를 펄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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