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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Apr 19. 2024

주인공은 화왕 모란

자연은 늘 나 보다 속도가 빠르다. 오늘 만난 빨간 꽃에게 인사를 하고 내일 오면 노랑꽃이 반겨준다. 내일 오면 노랑꽃은 어디 가고 홀씨가 바람에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감나무 여린 잎이 점점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채 연둣빛을 다 감상하기도 전에 무성하게 올라왔다. 담장 아래 새싹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한 뼘 넘게 자라 하얀 알맹이가 맺혔다. 바위 틈새 처음 보는 응큼한 녀석은 또 어디서 날아왔는지 얼굴이 거뭇거뭇하다.

. 반야라는 이름의 풀이다.


수돗가 옆에는 누가 언제 뱉어놓았는지 모를 아기 앵두가 자리를 잡았다. 스스로 발아해 나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른 봄날은 매일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 같다. 꽃잎이 흩날리니 내 마음이 싱숭생숭한다.


 어수선한 마당에 바람이 분다. 나무 그늘에서 담장 아래 구석까지 봄기운이 충만하다. 한 줌 흙이 있는 곳이라면 보도블록, 시멘트 틈새를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야 마는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은 삭막한 마당에도 푸르름을 가져다준다. 봄햇살과 봄비가 스며든 땅은 바람이 날란다준 생명을 틔운다.


그러나 놀라운 자연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다. 누구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햇볕이 공짜로 나누어 주는 영양소를 섭취하고 또 어느 누구는 햇볕 아래 따뜻함과 살랑바람의 체취를 느낀다. 나는 그저 창가에 앉아 졸린 눈을 하고 먼지 낀 창 밖을 바라본다.


자연의 뒤꽁무니를 뒤쫓아가는 나는 느림보 걸음으로 걷는다. 아름다운 모든 순간을 잡아채고 싶지만 그 걸음으로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다 담아내기 어렵다.  아쉽게 지나가 버리는 시간을 잡으며 기뻐할 뿐이다. 봄의 시간은 오전과 오후가 다르게 휙휙 지나간다. 겨울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는데 말이다. 봄을 담으려면 더 부지런해야 한다.


이번 주에는 빨강, 자주 영산홍의 군무를 노래하려고 했건만. 그네들은 화려한 부채춤을 추는 것처럼 한 꽃봉오리를 세 갈래, 네 갈래로 나누어 활짝 피우고선 새들의 노래를 반주 삼아 벌써 무대에 올랐다.


대신 아침에 홀로 우아하게 무대에 오른 녀석이 있었으니 오늘의 주인공 되시겠다. 모란이 고개를 내민 지 하루 만에 활짝 폈다. 화왕이 납셨다는데 안나가 볼 수 없어 비척비척 걸어 나가 화단 돌부리에 발을 얹었다. 자꾸 올라가니 무게에 못 이긴 정원석이 달아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붉은 영산홍의 화려한 군무 뒤로 단아하게 피어나는 모란을 마음에 담았다. 여리고 여린 자줏빛 커다란 잎이 둥그렇게 알찬 초록 꽃받침 위에 안정감 있게 자리 잡았다. 가지런한 계란 지단 올려놓은 듯 황금빛 수술이 맛있어 보인다. 손으로 건드려 보니 샛노란 꽃가루가 잔뜩 묻는다. 동네사람 누가 지나가나 한번 살피고선 오므라든 꽃잎을 살짝 벌리고 꽃향을 한가득 마셨다. 커다란 꽃잎을 벌리고 맡는 모란향이 그윽하다. 배고픈 꿀벌은 어디 있지? 꿀벌도 나처럼 자연의 시간을 뒤쫓아가는 느림보일까? 발가락에 꽃가루를 묻히고 가면 노란 신발을 거저 신을 수 있을 텐데... 꿀벌도 모란의 향내에 취할 텐데... 올해엔 유난히 꿀벌이 안 보인다.

주인공 화왕 모란

마당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자연은 정지된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도 자연이라서 자연의 속도에 맞추어 가나 보다. 순간의 감동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시간. 그 시간을 잡으려고 아쉬움에 셔터를 눌러댄다. 조금이나마 그들의 속도를 헤아려보려고 하지만 여럿이 한꺼번에 자라나는 작은 숲 같은 마당을 다 담지 못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자연도 거대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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