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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부공감 13화

주부의 양심은 야채 박스를 싣고 1

by 눈항아리

대충 밥을 하다 보니 마음이 또 콕콕 찔린다. 주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심 같은 것 때문일 테다. 나만을 위한 ‘배가른 코다리’도 시켰으니, 온 가족의 건강을 위한 부재료도 주문해 볼까. 저렴한 야채로 그럼 한 번 시켜볼까? 아침은 보통 밤보다 냉철해진다는데 쇼핑과는 무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야채와 더불어 과일도 시켜볼까. 장바구니에 넣다 보면 품목이 계속 늘어만 간다.


코다리 코에 같이 꿰여 그날 아침 함께 주문한 야채 등이 어제 줄줄이 택배 박스로 도착했다.


브로콜리 한 박스, 8개 들었다.


당근 한 박스, 5킬로그램.


양송이버섯 한 박스, 2킬로그램. 복이의 스파게티 요리를 돕기 위해 주문함.


얼갈이배추 한 박스, 엄청 많음. 부피가 상상을 초월함.


된장 한 박스, 9킬로그램. 맛있는 얼갈이 된장국을 끓여 먹고 싶어 주문함. 짜지 않다고 하여 세 개를 주문함.


블루베리 125그램 4팩.


배가른 코다리 한 박스, 엄청 큰 코다리가 4마리.


먹는 것을 박스로 받으면 기분이 좋다. 박스를 여는 순간 양에 놀라고 신선함에 놀란다. 그러나 박스에서 꺼내며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이것을 언제 다 먹을 것인가. 나는 대체 왜 그날 아침 이렇게 많은 야채를 주문한 것일까. 박스에 담긴 야채를 손질해서 보관하는 것도 모두 나의 몫이라는 걸 깜빡했다. 어쩔 것인가 ‘주문하기’를 눌러버린 손가락을 탓해야지.


가게에서는 번잡스러워 박스를 풀 수 없었다. 그나마 당근은 가게에서 많이 쓰니 놔두고 퇴근했다. 나머지 박스를 들고 퇴근하였으니,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다. 야채는 손질해서 바로 넣어야 하는데...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된장은 잊었다. 꼭 필요했는데 빠뜨리고 퇴근했다. 된장.


저지르면 수습도 잘하는 주부사원. 늦은 밤 퇴근하여 손을 걷어붙였다. 힘을 낼 땐 힘을 내야지.


얼갈이 박스를 열었다. 대체 박스가 왜 이렇게 큰 것인지. 커다란 박스에 틈새라고는 없다. 박스 가득 얼갈이만 가득이다. 이렇게 정직한 박스 포장이라니! 퇴근 후에는 일절 주방 출입을 않던 엄마가 주방을 차지하고 앉아 박스를 열어젖히고 있으니 복실이가 묻는다.


“엄마 뭐 해? “


“엄마 요리하지. ”


“엄마는 하루 종일 요리하는 거야? ”

낮에도 학원 가기 전에, 학원 갔다 와서, 그 후로도 계속 주방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곤 팔이 아프겠다며 콩콩 두드려주던 우리 딸. 그런 딸의 응원에 힘을 내 본다.


그런데 복실이는 자꾸 내 옆에서 알짱거린다. 옆에 있으나 늘 그리운 엄마. 복실이의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칼을 들고선 박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집에 와서도 자신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게 약간은 서운했으리라. 아이 잠자는 시간에 나는 대체 왜 주방을 이런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엄마의 눈길을 받으며 사랑을 독차지하는 박스의 정체가 궁금했을까. 박스 옆을 서성이며 묻는다.


“엄마 이건 뭐야? ”


“얼갈이야. ”


“얼간이? “


“얼갈이배추야.”


“오빠 이거 얼간이 배추래. 하하하하하. ”


졸지에 얼간이가 되어버린 배추 녀석이다. 아주 고소하다.



깊은 냄비에 물을 담아 팔팔 끓인다. 소금 조금 넣고 바글바글 끓인다. 물만 계속 끓이면 안 된다. 얼갈이배추 머리를 자르고 나박나박 썰어준다. 썬 후 데치고 씻고 데치고 씻고 데치고 씻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풀이 죽어 한 줌 밖에 안 되는데 생것은 왜 그리도 부피가 큰 것인지. 몇 회를 반복한 것인지 세지를 못했지만 열 번은 넘게 반복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몇 킬로그램인 것인가. 그 많은 얼간이는 4킬로그램이다. 큰 냄비는 가게에 가 있다. 내 이놈의 커다란 곰솥을 하나 기필코 사고야 말 테다. 커다란 냄비에 한꺼번에 넣고 데치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중간 냄비 속 끓는 물에 얼갈이를 넣고 빼고를 반복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마트에서 조금씩 사다 먹을 걸. 횟수가 반복되자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주방은 엉망이 되고 있었다. 뚝뚝 아무 데나 떨어지는 물방울. 배추의 잔해물, 수납장에서 마구 나온 커다란 그릇들. 소쿠리, 볼, 그릇, 받침 그릇... 그러나 이것은 까만 밤을 여는 야채 파티의 서막일 뿐이었으니.



이제 막 하나의 박스를 열었다.


주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아내의 움직임을 보고선 다정한 남편은 파를 한 움큼 잘라다 주었다. 흠흠. “그럼 한 움큼만 더 가져다줘요. ” (제발, 나야 왜 그랬니)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얼갈이만 데쳐서 얼리려고 했는데...


왜 나의 몸과 마음과 손은 따로 노는 걸까?

왜 주부의 양심은 이다지도 끈질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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