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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다 미국 생활, 빈둥빈둥

미국일기_할머니 되는 나날

by 올리 Mar 27. 2025

열흘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나는 백수다. 미국.. 에서 말이다.


예비할머니로서 그 소임을 다 하고자, 딸의 출산 예정일을 2주나 앞서 미국 땅에 들어왔다.

주변 사람 대부분이 예정일보다 빨리 출산을 했다고 자기도 그럴 줄 알았던 나의 딸은, 이제는 약간 초조한 국면에 들어서는 듯하다. 그 덕분에 나는 매일 백수처럼 지내고 있다.  


내가 딸아이를 낳았을 때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는 통근길이 너무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1월 중순이 예정일이었는데도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끼고 출산 예정일보다 2주쯤 일찍 휴가에 들어갔다. 그때의 나도 '예정일보다 빨리'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왠 걸. 나는 미리 휴가를 당겨 쓰느라 까먹은 날짜 때문에 몸 풀고 한 달쯤 지나자 다시 출근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출산휴가는 2개월이었으니까.   


여기 미국 텍사스는 지난 주가 봄방학이었다. 

딸아이 계산으로는 그 기간 중에 아기를 낳으면 자신은 학교 일정에서는 딱 2주만 쉬고 다시 출근할 수 있으리라..이었다. 봄방학 기간까지 합치면 총 3주가 되니 삼칠일은 되지... 싶었던 것. 그러나 나의 손녀따님은 엄마 뱃속이 마냥 좋은지 기간을 당겨서 나올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가 보다.


군입대하는 심정일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서울 떠나올 때 와는 달리, 이곳에 와서 열흘쯤 지내고 보니 마음이 헐렁해졌다. 지난 기간 동안 주일 예배 2번 참석했고, 베이비 샤워 때 들어온 무지막지한 양의 선물들을 정리했다. 상자를 풀고 종류별로 정리하고, 면제품은 싹 빨아 새로 조립한 서랍장에 넣기도 하며. 음악회에도 한 번 갔고, 차로 10분쯤 떨어진 호숫가를 찾아 여행 온 사람처럼 신나게 걸어도 보았다. 사돈댁 가족들과 어울려 식사 몇 번 했는데, 흠.. 또 으흠.. 뭐 했더라...?  


내가 여기 와서 굳이 '의미 있는' 생활이라고 한다면 자전거를 타는 일이다. 

자전거는 정말 매일 탄다. 출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딸 내외의 기상 시간은 나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늦은 느낌이다. 3년 전 왔을 때는 굳이 소음을 일으키며 아침식사를 준비하곤 했는데, 그들이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금방 접었다. 나는 저들보다 일찍 눈이 뜨니, 밖이 훤해지는 대로 집을 나가 한 시간쯤 산책을 했던 것. 그런데 그 시간이 이번에는 자전거 타기로 바뀐 것이다.  

 

딸네 집엔 바퀴도 작고 다루기가 쉬운 브롬톤 자전거가 두 대 있다. 

예물 대신 지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 선물. 자전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위는 브롬튼 말고도 다른 자전거가 많고, 또 이것저것 잘 타고 있지만, 딸의 자전거는 늘 세워져만 있던 상황. 내가 그것을 사용도 해 줄 겸, 나의운동도 겸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침에 눈 뜨는 대로 딸의 자전거를 끌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이른 아침도 아닌데,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출근을 하는 지 큰길로 나가는 자동차만 더러 지나곤 하는 매우 한적한 주택가를 휘휘 돌아다니는 시간은 내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어색한 시간을 때우고자 시작한 일인데, 사이클용 선글라스에 얼굴 가리는 마스크까지 사위한테 얻어 쓰고는 잘 달린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타고나면 땀이 흠뻑 난다. 시원하게 사워하고 나면, 안사돈이 지인에게서 얻었다며 내게도 건네준 기초화장품 세트를 치덕치덕 바르며 소꿉놀이를 한다. 서울 같으면야, 후다닥 씻고 화장품은 바르는 둥 마는 둥 했겠지만 여기서는... 욕실을 나가도 급하게 바쁘게 요긴하게 일이 없다. 

점심때쯤에나 딸아이 얼굴을 볼 텐데 종종 거리며 살았던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한 오전 시간의 한량짓을 하고 지낸다. 


할 일없이 무료하던 참에 자전거라도 열심히 타서 안 그래도 날로 가늘어지는 나의 허벅지를 굵다랗게 만드는 일은 좋긴 하다만, 출산하는 딸네집에 생활 도우미로 지원 나온 이 친정엄마가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기도 하다. 딸과 사위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청소나 빨래 등 생활 속 귀찮은 일들을 도와주려고 왔는데.. 말이다.


우선 음식 만들기. 요게 참 어려운 일이다.

거의 구경꾼 노릇하며 법 먹고 지낸다. 내가 뭘 하려고 도마질이라도 하고 있으면 딸과 사위가 쓱 나타난다. 그리고는 거들겠다며 달려든다. 그런데 손 빠른 사위가 개입하면 잠깐 사이 주객이 전도된다. 나는 말로 지시를 하고 있고, 썰고 볶고 굽는 등의 중요한 과정은 사위가 다하고 있다. 딸은 어떤가?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뭘 해보겠다고 내가 시작하지만, 미국 생활 10년이 되어가는 나의 딸은 내 생각과 영판 다른 레시피를 생각하기 일쑤. 

안 그래도 '이것을 하려면 저것도 없고, 그것도 없어서 어떻게 하지..' 걱정하는데, 딸의 입장에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으니.. 하며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어낸다. 상상초월이다. 그래서 점점, 음식 준비의 주도권- 잡으려고 한 바 없고 그냥 도우려고만 했지만 - 은 다시 저들 부부에게 돌아가고, 나는 손님처럼 숟가락 놓기, 물컵 놓기.. 그런 거나 하게 된다. 

 

빨래.

딸 내외는 지들 방안에 빨랫감 모으는 통이 따로 있다. 운동이다 뭐다 하루에도 몇 벌씩 갈아입는 저들의 세탁물량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세탁장 주변에 빨랫감을 쌓아 두지 않으니 나는 내 속옷이나 손으로 살살하는 정도. 그러다 가끔은 확 뒤집어진다. 내가 자전거를 타러 나갈 때는 한밤 중 같았던 저들이었는데, 자전거를 다 타고 들어올 때는 거실을 왔다 갔다 온 집안이 분주하다. 세탁장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가곤 한다. 세탁기 돌리기는 벌써 끝난 셈. 내 방에 들어와 베개 커버를 벗겨감은 물론, 슬그머니 벗어둔 옷가지 몇 개도 가져가 달달 돌려 말리고 있다. 빨래 좀 해 볼까?라고 물어볼 기회가 거의 없다. 빨래, 그것도 내 영역이 아니다.  


청소는? 설거지는?

하루 중에도 컵과 텀블러와 접시와 칼과 수많은 것들이 개수대에 툭툭 쌓이곤 했다. 그런 것들이 나올 때마다 부지런히 씻어 치웠더니 어느 날 사위가 내게 공손히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 이거 쓰시면 돼요.'

식기세척기 문을 척 열면서 그 안에 모아둔 설거지 감들을 보여준다.  

아녀, 아녀, 난 그때그때 손으로 씻는 것이 좋아... 그러면서 굳이 손설거지를 고집 피우는 것은 '좋지 않다'는 느낌적 느낌이 화악 들었다! 

사위의 조언을 즉시 접수하고 설거지 감이 나오는 족족 세척기에 집어넣는다.  


이곳은 확실히 서울보다 먼지가 없다. 

서울 우리 집보다 훨씬 넓은 공간인데도 소기는 가끔 필요할 때만 살짝 돌린다. 게다가 이곳의 건조한 날씨는 벌레나 곰팡이도 잘 안 생기는 듯하다. 빵이나 과일을 상온에 며칠을 두어도 끄떡없는 것을 보니 쓸고 닦으며 환경 위생에 신경 써야 할 일이 서울 대비 훨씬 적다. 

 

이렇게... 

딸의 산후조리 하겠다고 미국까지 출장 온 이 친정엄마는 멍하니 지내고 있다. 

하기사, 내 비록 '친정엄마'라는 타이틀로 이곳에 오긴 했으나, 주부생활이 내 전공은 아니므로 이런 나날이 여엉 싫지는 않다. 도 엄마의 그러함을 잘 알고 양해해 주겠다, 비록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집중 잘 되지 않아도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그러고 있다. 

주부 일선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백수처럼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이게...  

아기 태어나기 전, 폭풍전야의 느낌 같기도 하고. ㄷㄷㄷ 

아무튼 친정엄마는 현재, 매우, 몹시 빈둥빈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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