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봉 Jun 21. 2024

남동생의 장례식

  그리운 추억들과 아픔

우리 가족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농촌에서 형제는 4남 3녀였다

7남매 중 장남인 나는 삼촌들은 상급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내 바로 밑으로는 두 살 세 살 터울인

동생들이 줄줄이 함께 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에 가까운 서너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산촌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조금씩

도와 드리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이렇게 가정이 어렵다 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육성회비와 수업료를 항상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 툭하면 교무실에 불러가 상담하느라 학창 시절은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남동생의 교도관 시절 )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 들고 취업할 곳이 없어 음식점에서 보조와 카운터, 건물과 야외 행사장에서

24시간씩 야간에 경비원을 하면서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체신행정 공무원이 되어 연달아 성장하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와 봉천동에서 보증금 50만 원에 월 5만 원씩 내는 사글셋방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자취를 했다


                             (남동생의 장례식)



내가 매월 받은 봉급 10만 원은 월세 5만 원으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있으면서 용돈과 반찬거리를 사면 매월마다

저금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내가 우체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남동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남동생 역시 용돈이

부족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아르바이트 일을 24시간씩 교대로


근무하면서 동생도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다.


이렇게 우리 집의 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동생들이나 나나 어렵게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공무원에

합격하여 체신부와 철도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였다.


현역 사병으로 전역한 남동생 금채도 궁핍한 부모님께 의존할 수 없어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에게

와서 아르바이트 일과 도서관에서 틈틈이 법원직 공무원을 준비하다가 우연챦게 응시한 교정직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고향에서 교정직 공무원으로 교도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월급은 박봉이지만 나와 동생이 그래도 적은 금액이나마 매월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받는 공무원 봉급과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형제를 보면서 어머님은 항상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셨다.


어쩌면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어머님의 인생 중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전성기가 동생과 내가 공직생활을 하던 시절인것 같다 ㆍ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잠깐ㆍㆍㆍㆍ

동생이 퇴근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바로 그날 현장에서 사망해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이 되어 버려 어머님은 실성한 사람처럼 10년을  사시다가 별세하셨다.

남동생이 스물아홉에 교통사고를 당해 바로 현장에서 사망해 버리니 우리 가족들은  뼈를 깎는듯한 고통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30여 년 전 화장문화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터라 서너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향집에서

상여를 구입해 집과 떨어진 산에 동생을 묻어야만 했다.

              (남동생 관련 일상의 사진들 )


평소에 형인 나를 너무 잘 따르고 우애가 좋았는데 하루아침에 가 버리니 동생의 장례식도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동생이 근무하는 교도소에서 소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전 직원분들이  근무하는 제복을 착용하고

최대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어 교도관님들께 너무 고맙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고 감사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동생을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지만 수십여 명의 제복을 입은 교정직 공무원들 이 내 가족처럼

혼연 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남동생의 례를 치러주어 마음도 든든했고, 동생이 제복을 입은

교정직 공무원 즉 교도관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벌써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남동생의 뒤를 이어 어머님과 누나 그리고

또. 다른 막내 남동생과 나이 어린 조카도 하늘의 별이 되어 버렸으니 생각하고 되돌아보면 슬프고 가슴 아프다


그래도 30여 년 전 산천초목이 푸르고 이렇게 무더운 초여름날 동생이 떠났는데, 지금의 날씨가

무더위로 기승을 부리니 너무 일찍 떠나버린 남동생들과 가족들이 보고 싶고 그립다


이제는 차량과 운전과 관련하여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대폭 감소하거나 없어지는 교통사고 선진국이 되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이전글 고춧잎 절임과 물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