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 6학년부터 중학교 때까지 시조대회 학교 대표로 활동했다. 5학년 때는 6학년 언니, 오빠들이 대회에 나갔기 때문에 나는 연습생인 셈이었다.
6학년이 되어 드디어 시 학예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시제가 저금통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학교에 남아 연습할 때 써 본 시제였다. 쓴 대로 술술 써내려 갔더니 시간이 너무 남아 민망했다. 무엇보다 감독관 선생님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왔다갔다하시는 것이었다. 써 본 대로 그대로 써내는 것이 대회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 현장에서 시제를 받고 제한된 시간에 즉흥적으로 시상을 떠올려 완성시키는 역량을 가리는 것이 대회의 목적인 것이다.
그대로 멀뚱하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시조를 새로 썼다. 2연에서 1연을 추가하여 3연을 완성했다. 고생 끝에 낙 온다는 표현을 처음에 썼다가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라고 바꾸었던 것이 기억 난다.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내심 최우수상을 기대했는데, 지도선생님도 나도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물론 장려상도 우수하지만 우리의 교육 환경 속에서 2등은 늘 1등에 가려지게 마련이다.
반면, 시 대표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친구는 5학년 남학생이었다. 대회 날 끝나고 시, 시조 대표 네 명이서 짜짱면을 사 먹었는데 그 친구가 어찌나 웃기는지 짜장면을 삼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시 영재였다니, 우스꽝스럽던 얼굴이 달리 보였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도 대회에 나가서 차상까지 받아 보았다. 차하, 참방을 받은 적도 있다. 장원은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때는 대회도 컸고 그렇게 아쉬웠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상 여부를 떠나서, 큰 대회에 나가 다른 우수한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본다는 것은 참 좋은 경험이었다.
시조는 나에게 익숙하다. 자신 있다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익숙하다라고 할 수는 있다.
당시에 심사위원이셨던 이우걸 시조시인. 아직도 문단에서 거목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계시니 참으로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의 이우걸 시인의 모습이 아직도 어제 본 듯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