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망상입니다...
야간 단속 후 늦은 퇴근길, 고속도로를 달리다 피곤함에 졸음이 몰려와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뭔가 마실 걸 사서 잠도 좀 깨고 쉬었다 출발하고 싶었습니다. 어제보다 포근해진 날씨에 차에 외투를 벗어 두고 휴게소로 들어갑니다.
저녁 여덟 시.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휴게소는 한산합니다. 휴게소 맛집 같은 타이틀과는 거리가 있는 그냥 평범한 곳이거든요. 사람들은 제각기 볼일만 마치고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합니다.
커피 전문점에서 포장을 할까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고는 생각을 바꿔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의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냥 보리차나 마실까 했거든요.
이 편의점에서 인터넷에서나 봤던 놀라운 광경이 눈에 꽂힙니다. 음료 진열대가 기가 막히게 정리되어 있었던 거예요.
편의점_근무자의_재능낭비_. jpg
진열대 규모도 꽤 컸는데, 비치된 음료의 라벨이 전부 한 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었어요. 마치 퇴소 전 마지막 긴장감을 안고 있는 특전사처럼요.
마실 걸 고르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이쪽저쪽을 구경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까지 정리를 한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졌어요.
상당히 꼼꼼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정리정돈에 약간의 강박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망상회로를 돌리는 중 군데군데 다른 사람의 흔적이 눈에 띕니다.
네, 그래요. 농땡이 피우는 개미 마냥 다른 곳을 쳐다보는 비행 음료들이 있었던 거예요. 이건 분명히 근무자 소행이 아니에요. 수많은 음료를 들었다 놨다 한 손님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사람 심리는 다들 비슷해요. 저 역시도 백화점에 있는, 관절이 움직이는 마네킹의 손을 보이는 족족 '좋아요'로 만들다가 아내한테 등짝을 맞기도 했었어요. 그래도 멈추지 않습니다. 재밌거든요.
그런데 재미와는 별개로 근무자의 성격에 따라 이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열대를 한 바퀴 돌며 한눈팔고 있는 라벨을 깨우고 커피를 하나 골라 계산대로 갑니다.
계산대 직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심코 말이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저 음료수 사장님이 정리하신 것 같은데 무지 꼼꼼한 성격이신가 봐요."
"아뇨, 그냥 혼자 있다 보면 심심해서 그냥 맞춰둔 거예요ㅎㅎ"
생각보다 간단하게 궁금함이 해소됐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정말 심플하고 솔직한 이유였어요. 만약 강박이 있는 성격이었다면 누군가 음료를 돌려 두는 꼴을 못 봤겠죠. 아주 간단한 겁니다.
뇌피셜을 너무 멀리까지 보내서 되돌아오지 못한 적도 많은데 이놈의 망상은 없어지질 않네요. 아니, 한탄할 때가 아니죠. 어차피 망상을 떼고 살 수 없다면 좋은 쪽으로 발전시켜야겠습니다. 어쨌든 글거리가 하나 생겼잖아요?
깔끔히 정리된 음료 하나로 온갖 상상을 하게 해 준 편의점 근무자께 감사드립니다. 당신 덕분에 오늘의 깨달음을 얻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갑니다. 졸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