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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행동이 '운'이란 친구를 만나면?

'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by 보리아빠

시간이든 재능이든 돈이든 가급적 '낭비'라는 단어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무의미한 행동은 그런 면에서 '낭비'라는 단어와 참 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무의미한 일이라도 해보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의미한 행동이 '운'이라는 신통방통한 친구를 만나면 '무'가 사라질 수도 있거든요.




배수지 시설 전체를 돌며 얼굴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습니다. 한 달 정도 그렇게 날씨의 변덕을 느끼며 시내 곳곳을 누볐고,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갈수록 경험은 다채로워졌습니다. 생전 본 적 없었던 사마귀 유충도 보고, 두더지가 파 놓은 굴의 입구도 구경했습니다. 제비꽃과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는 좋았지만, 염소의 독한 냄새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재미난 기억을 가지고, 마지막 배수지의 점검을 하고 있었죠.


업무 인수인계 목록에 없었던 철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 자리 번호를 돌려 맞추는 자물쇠의 빨간 녹이 설치 시기를 가늠하게 해 주었지요.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전임자와 전전임자에게 이 물건의 존재에 대해 물어봤지만, 아무 소득은 없었습니다.


이 문을 열어야만 점검할 수 있는 설비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니 자물쇠를 자르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유압절단기 같은 사용 빈도가 낮은 연장 따위가 차에 있을 리 없었죠. 기름밥 먹는 사람들이 아닌 용역사도 마찬가지였고요. 주변에 특수절도 경험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그 잠시란 시간도 아까워졌습니다.


결국 저 자물쇠를 잘라 줄 업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출장비가 들겠지만 시간은 아낄 수 있겠지요. 그래서 바로 출장이 가능한 업체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모하고 쓸데없는 생각이 살짝 떠올랐습니다.


한번 맞춰볼까?


전 부질없음을 잘 알면서도 잠겨 있는 자물쇠를 보며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0부터 9까지, 열 개의 숫자. 번호는 네 자리. 그렇다면 무작정 덤벼서 맞출 확률은 10 ×10 ×10 ×10=10,000이 되네요. 이 낮은 확률을 계산했음에도 이상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오더라고요.


어차피 업체를 불러도 오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니, 기다리는 동안 시도 정도는 해봐도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실 고등학교 때 길에서 주웠던 전자수첩의 비밀번호를 맞춰본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땐 한 3,000번 넘게 시도했던 것 같아요. 이러나저러나 시도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999, 8888, 7777... 그렇게 9부터 자리를 내려가며 다이얼을 돌려보고 있었습니다. 0000까지만 같은 자리로 숫자를 맞춰보고 열리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찍기를 일만 번이나 할 정도로 무모한 성격은 아니었거든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면 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경우의 수가 조금씩 줄어 9,991번 남았을 때였습니다. 1111... 철컥! 자물쇠가 열렸습니다. 전 쾌재를 부르며 연락했던 업체에 해결됐다고, 나오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열린 자물쇠를 내려놓았습니다. 무의미할 것 같았던, 쓸데없는 시도가 운을 만나 의미 있는 행동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시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점검 시간도 줄었습니다. 게다가 내부에 진입해 둘러보니, 같은 자물쇠가 걸려 있는 맨홀이나 펜스가 몇 군데 더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처럼 1111로 맞춰보니 전부 열리더라고요. 마침 점심때가 다 되어 조금씩 허기에 지쳐 능률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다행이습니다.


그렇게 쓸데없는 시도를 한 덕분에 시간도 비용도 아끼게 되었습니다. 점심도 제시간에-사실 이게 다행이라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먹을 수 있었고요.




이번 경험 덕분에 나중에 다른 일을 할 때 비슷한 일이 생기면 일단 시도는 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엔 낭비로 끝나버리긴 했지만, 소소하게 성과가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복권 같은 걸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만 그래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제 조상님은 워낙 바쁘셔서 생전 꿈에 안 나오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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