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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위한 첫 번째 선물(윤문)

퇴고도 같이 했습니다.

by 보리아빠

미야 선생님의 글빵 수업을 들으며, 발효가 되는 과정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도입 문장, 퇴고, 윤문 등 '작가 지망생'이라는 위치에 걸맞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매거진에 발행했던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주제가 떠올랐고, 윤문을 거쳐 새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읽어주신 분들, 소중한 감상을 남겨주신 분들께 누가 되지 않게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파란색 글자가 수정한 부분입니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찍히는 순간, 부부는 엄마와 아빠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를 위한 첫 번째 선물은 뭘까요? 아마 '배냇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사랑으로 표현한 첫 번째 선물은 평생 아이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서윤이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이름인 '보리'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2018년 겨울, 금의 아내와 가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금방 찾아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산전 검사도 받고 엽산 같은 영양제도 먹으며 준비했어요. 하지만 자연임신은 그리 쉽게 되지 않았어요. 매번 임신 테스트기는 한 줄만 찍혔지만, 마음이 조급하진 않았어요. 우린 둘 다 젊었고, 건강했으니까요.


하지만 아이 소식은 전혀 없었고, 마음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전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보면 어떨까 싶어 이야기를 해봤어요. 아내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조금은 인연을 더 기다려 보고 싶었나 봅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이 닦고 간절히 바라면, 삼신할매가 좋은 아이를 보내줄 거라 얘기하는 아내의 말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아내와 저는 불가에서 만난 연으로 부부가 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一切唯心造)'는 가르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힘의 크기를 알기에, 아내와 전 그때부터 매일 금강경을 독경하며 마음을 닦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3년이 넘어도 찾아오지 않았고, 전 고심 끝에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만약 올해까지도 소식이 없다면, 상담을 받아 보는 건 어떠냐고 말이에요. 오랜 시간 고민을 한 아내는, 제 의견에 따르겠다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인공수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아내가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고마움보단 미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빠가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한참을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일전에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을 닦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같이 기도해요."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간절함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매일 독경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부턴지 아무 감정 없이 경전만 읽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100일 동안 108배를 시작했습니다. 찾아올 아이를 간절히 그리며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아무리 피곤한 날도 하루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하며 오랫동안 혼자서 담아 두었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이름을요.


보리(菩提).


부처의 깨달음과 지혜를 뜻하는,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는 제 아이가 부처의 마음을 갖고 지혜롭게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배냇이름으로 선물하려고 생각해 두었던 말이에요. 혹시나 아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조심스럽게 품고만 있었어요. 그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매일 수행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108배를 시작하고 9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작은방에 좌복을 펴고 기도 준비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습니다.


"여보, 여보, 여보!!"


다급한 목소리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내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먹이며 손에 든 임신 테스트기를 제 손에 쥐어줍니다. 선명하게 그려진 빨간 두 줄. 그렇게 바라던 아이가, 드디어 찾아온 거였어요.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말은 필요 없었어요. 그저, 아내를 꼭 안고서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 뿐이었죠. 아이에게 엄마, 아빠라는 이름을 선물 받은 순간이었습니다.


조금 뒤 마음을 가다듬고, 그동안 혼자 간직해 왔던 '보리'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습니다. 언젠가 아이에게 배냇이름으로 주고 싶어 준비했다는 이야기와 함께요. 아내는 한 글자씩 신중히 배냇이름을 불러 보더니, 좋은 뜻의 좋은 이름이라며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보리야, 아빠가 널 만나기 전부터 생각해 두신 이름이래, 마음에 드니?"


조심스럽게 배를 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아내를 다시 한번 안아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간절한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모를 일입니다. 간절한 마음의 힘이 만들어 준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다음날, 산부인과에 가서 의학적으로도 임신 확인을 받았습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이 또 나더라고요. 가족에게도 이 소식을 알어요. 아이가 생겼다는 게 좀 더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를 위해 뭘 더 해줄 수 있을까... 그래서 이번엔, 소중히 찾아온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또다시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저 눈썹은 아빠에게서 온 게 분명합니다.


그러고 열 달 2주 뒤, 드디어 보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보리를 보고 한 번, 무려 16시간이나 홀로 진통을 견뎌 준 아내를 보고 또 한 번 눈물이 터져버렸어요. 우리는 아이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인 '보리'라는 이름을 반복해 불러주며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보리는 이제 '서윤'이라는 이름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밝고 지혜로운 아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슬기 서(諝)에 햇빛 윤(昀) 자를 사용해 이름을 지었어요. 그 이름에 걸맞은 아이로 키우기 위해 매일 간절히 바랍니다. 항상 더 나은 부모, 지혜로운 부모가 되도록 열심히 살겠다고요.


그렇게 찾아온 서윤이가 이제 네 살입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젠가 서윤이가 조금 더 자라면 '보리'라는 배냇이름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려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이름을 선물했는지, 이 이름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말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귀한 이름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소중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네가 지혜로운 아이가 되도록 엄마 아빠가 많이 노력할게. 사랑한다, 우리 딸."


서윤이가 태어나던 순간에 했어야 했던 아빠의 첫마디를, 이제야 건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긴 가족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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