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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이 Jun 17. 2024

천년고도 교토 외곽에 숨겨진 보석들.

호센인, 쇼린인, 산젠인, 루리코인. 그리고 맛있었던(!) 기린(?)

 교토에서의 셋째 날 이른 아침, 조금 더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그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져있지 않았지만, 부지런을 떨어서라도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전날 저녁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가와라마치 아침 거리의 한산한 모습이 낯설었다.

곧 그 전날 가모강 너머로 보이던 교토의 북쪽 '오하라(大原)'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번이 세번째 교토였기에 안 가본 곳이 어딜까하고 찾다가 정한 목적지가 그곳에 있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 위에서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이 뒤섞였다.

'잘 찾아가고 있는 거겠지?'

'생각한 대로 조용히 감상할 수 있겠는걸.'

그러나 이내 송이송이 떨어진 동백꽃 오솔길이 여유롭게 찬찬히 찾아가라는 듯 나를 맞아주었다.

끝 무렵이지만 동그란 자태가 풍만한 동백꽃이 나뭇가지에 발갛게 피어있었다.

벚꽃잎과 동백꽃이 함께 어우러진 길이 참 예뻤다. 난 그야말로 꽃길을 걷고 있었다.


호센인(宝泉院).

1012년에 지어졌고, 액자식 정원의 형태로 창 너머로 700년 된 소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불교 사원이다. 이곳만이 이날의 정해진 목적지였다.

바라던 대로 가장 먼저 호센인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창문 너머로 거대한 소나무의 기운과 주위를 감싸고 있는 녹음의 선선 향기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수령이 700년이나 되었다는 호센인의 소나무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몇 갈래의 소나무가 사방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가지 무게를 지탱하기가 어려운지 여러 개의 버팀목이 대어져 있었다.

'이 소나무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걸 지켜봐왔을까?'

시원한 풀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오고, 따뜻한 말차는 목을 적셔준다.

이렇게 700살 먹은 소나무의 자태를 감상하며 한없이 고요한 아침 명상 시간을 보냈다.


쇼린인(勝林院).

호센인의 바로 위에 자리한 다소 소박한 불교 사찰로, 1013년에 창건한 꽤 오랜 곳이다. 내부는 넓지 않지만 긴 세월이 스쳐간 흔적이 구석구석에 온전히 남아있었다.

절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왔을 석등과 하늘을 향해 끝 모르고 솟은 나무들.  

목재에 색을 입혀 꾸미지 않고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종각마저도 예스러웠다.  


산젠인(三千院).

784년에 세워진 불교 사원. 왕생극락원(往生極樂院)이라는 국보를 품고 있고, 다 둘러보는 데에 한 시간 정도를 소요할 만큼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경내는 곳곳이 색감이 저마다 다른 녹색으로 가득하다. 맨눈으로 보아야 더 아름다울 곳이다.

불자는 아니지만 귀여운 엽전 모양에 마음이 끌려 행운의 복전(福錢)을 하나 구입했다.

물에 곱게 떠있는 동백꽃 한 송이가 초록의 배경에 콕- 점을 찍어 놓은 듯 선명한 붉은빛을 발한다.


기린(来隣, きりん).

오하라 마을 안에 있는 채식 뷔페 식당이다.

호센인을 볼 생각에 일어나자마자 길을 나섰고 쇼린인, 산젠인까지 구경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12시.

제법 출출했다. '채식?' 갸웃하면서도 '뷔페'라는 말에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였다.

구글지도를 의지해 밭 사이의 좁은 길을 가로질러 찾아온 KIRIN 식당.

5가지 맛과 모양을 뽐내는 오니기리들이 참 앙증맞기도 하다.

채소 위주로 잘 차려진 다양한 요리들. 주방에서는 계속 튀기로 볶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10개를 먹지 못한 게 뒤늦게 후회되었던 통양파 튀김과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그대로 꺼내온 것 같은 고기 피망.

당근라페, 소송채(?) 나물, 감자샐러드 사이에 숨어있는 닭고기 반찬. 색깔도 저마다 달라 먹음직스럽다.

묵직하고 든든했던, 지금 생각해도 맛이 참 좋았던 기린에서의 첫 접시.

이후 두 접시를 더 비우고 나서야 식당을 나서면서 벽에 그려진 기린 그림을 알아보았다.

'기린이 정말 동물 기린이었구나.'

기린 때문에라도 오하라는 다시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반쯤 가서 버스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루리코인(瑠璃光院).

계절에 따라 1년에 약 5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만 개방하는 히에이산(比叡山) 기슭에 위치한 불교 사원.

석등과 돌길 사이까지 가득 메운 녹색의 이끼가 강렬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제각각 자라난 형태가 신기하기만 했던 이끼들.

그야말로 초록색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본관 2층에 올라갔더니 역시 사방이 온통 푸르다.

그리고 창 가까이에 펼쳐진 고동색 탁자에 자연스레 눈이 간다. 이 탁자엔 가까이에 앉아야만 드러나는 '비밀'이 숨어있다.

까만 탁자에 이렇게 바싹 다가가 앉으면, 자연이 만들어 낸 거대한 콜라주를 볼 수 있다.

봄기운에 청색을 잔뜩 머금은 단풍나무가 탁자 위에 한가득 쏟아져 내려 '무엇이 진짜 나무이고 무엇이 비쳐진 풍경인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멀리서 볼 땐 그저 탁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계절마다 바뀌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었다. 루리코인(瑠璃光院), 유리광원이라는 그 이름에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날 루리코인은 11월에 교토에 꼭 다시 방문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이 탁자에 넓게 펼쳐질 울긋불긋한 단풍의 콜라주를 상상만 해보아도 가슴이 설렌다.

창이 있는 곳마다 저마다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가료노니와(臥龍の庭)에서 인생 최고의 풀멍 사치를 누려본 듯하다.

곳곳마다 발목을 잡아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던 루리코인의 창(窓)들.

창을 통해 솔솔 밀려들던 풀냄새와 바람에 흔들려 바스락거리던 나뭇잎 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이날 하루 중 루리코인의 가료노니와(臥龍の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미끈한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아서 1시간 이상을 그저 말없이 흘려보냈다.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던 숲의 향기,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던 초록의 이끼와 나무들, 물가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는 작은 석등도 언젠가 다시 가서 보고 싶다.

한참의 풀멍 끝에 폐장시간이 가까워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리고 있던 찰나.

'뭔가가 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걸까, 등목을 하는 잉어라니.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떨어지는 물을 온몸으로 맞고 있던 잉어를 한참이나 재밌게 구경했다.

다시 만나자, 루리코인. 꼭.


버스를 타고 해가 지는 교토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이른 아침 서둘러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갔다.

스치는 거리의 풍경마저도 한장 한장 추억이 되는 교토이다.

기린에서 먹었던 풍성한 채식 덕에 이날은 밤이 늦도록 배가 고프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컵딸기가 아주 늦은 마지막 디저트가 되어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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