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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선 Mar 13. 2024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더 아름다울까?(라디오 방송)

만약에 우리...(라디오 방송 사연)

(이 사연은 KBS FM 이금희의 "사랑하기 좋은날"_만약에 우리 및 MBC 정선희 문천식의 "지금은 라디오시대" 첫사랑 사연 응모에 당첨되어 2021년에 방송된 내용입니다.)



Y를 만난 건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 인천에 사는 Y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한밤중에 외출할 명분을 찾지 못했던 Y는 나오지도 못하고 집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추위를 잠시나마 피해보려고 아파트 입구 공중전화박스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비 아저씨가 나오셨다.


"아, 날도 추운데 거기서 뭐 하는 거슈?"  


"제가 사실 이 아파트에 사는 여자친구를 만나려고 청주에서 막차 타고 막 올라왔는데요..."


사정을 들은 아저씨는 쫓아내진 않으시고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 청춘이 좋긴 좋구먼."


Y는 사흘에 한 번꼴로 토라지는 변덕스러운 아이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고, 학교 잔디밭에 누워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하는 특별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야, 너도 한번 여기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봐.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존재의 슬픔' 같은 게 느껴질 거야."


대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6개월의 시차를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같이 근로 장학생을 하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수강 과목이 달라지면서 얼굴 보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었다.

어느 날 밤 Y는 초초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내 심장에 폭탄 하나를 떨어뜨렸다.

어젯밤 왜 연락이 안 되었냐고 물으니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

그러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 온 남자와 밤을 같이 보냈다고 했다.

누구라고? 볼리비아에서 온 남자?


이전에도 Y한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남자아이였다.

영화에 조예가 깊고, 나한테는 없는 예술적인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예술가의 삶을 선망했던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길고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나한테도 다른 사랑의 경험이 있었다면, Y가 내 첫사랑이 아니었다면 용서할 수 있었을까?

6년을 한결같이 믿고 의지했던 Y였다. 그날 이후 어렵게 떠났던 내 유학 생활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밥 먹는 것도,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수업도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몸에서 혼이 나가버리고 나니 등굣길에 들고 가야 할 방 열쇠 대신 엉뚱한 물건들이 손에 들려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헤어진 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내며 수시로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며칠 뒤 우리는 이별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학교 연못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커플 반지를 연못 속에 힘껏 던져버렸다.



결혼이라는 게 우리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Y 또한 그 볼리비아 남자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낯선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까.

초록이 온 대지를 물들이고 살랑살랑 풀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요즘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연못 속에 던진 그 반지들은 그대로 있을까, 아니면 녹이 슬었을까?



(청취자들이 작성한 댓글들)

-이니셜로 나오니까 소설 읽어주는 것 같아요. (리안나 님)

-이니셜로 나오는 거 보니까 새드 엔딩이네요. (조정규 님)

-이건 완전 궁금한 이야기 Y양이네요. (이경아 씨)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간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최민정 씨)

-너무 가슴 아파서 다 듣지 못하겠어요. (0237님)

-사연 보내신 분 부디 새로운 사랑 만나셨기를요? (김한나 씨)

Y라는 분 대체 왜 그러셨나요? 너무하셨어요? 정말 그니까? 근데 참 그게 젊어서 그게 또 그죠?

참 나이 들면 그런 일이 좀 그러기에는 그 에너지도 모자라고 그냥 웃을 일 아닌데 (DJ 이금희 멘트)

-이별은 늘 슬퍼요. (안재욱 씨)

-반지를 망치로 찌그러뜨려서 우편으로 보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반지를 버렸을까요? 버렸다면 어디로 버렸을까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사연 들으니 (정욱 씨)

그걸 또 망치를 가지고 또 그냥 반지를 그때, 그 내리칠 때 마음이 또 어땠을까요?

막 그걸 또 우편으로. 참 나름의 이별 의식을 그렇게 치르셨군요. (DJ 이금희 멘트)

삶을 살아가면서 아픈 추억이 있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잔잔하게 별일 없이 지내는 게 좋을까요? (K7564님)

저는 아픈 추억도 나를 성장시키고 깊이 있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DJ 이금희 멘트)

사연 들으니 기억 속 오래된 제 아픈 사랑도 생각납니다. (김재덕 씨)


#에세이 #라이프스타일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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