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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May 03. 2024

마음에서 그를 지워내고 있는 중

 

 나는 어렴풋하게 그러나 점점 선명하게 인식한다. 이렇게 다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여전히 그를 좋아한다고, 계속 그를 좋아하고 싶다고, 그를 보면 자꾸 마음이 커진다고. 나는 분명 그를 비워낼 거다. 그를 있는 힘껏 계속 좋아하다 내 마음이 더 이상 그가 아닐 때 나는 그를 떠나보낼 거다. 후회는 없으니 미련까지 남지 않을 때까지 이 사랑을 계속 더 하다가 내가 이제 그 앞에서 더 이상 허둥대지 않고 버벅대지 않을 때, 그의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내 용모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지 않게 되면 그때 이 사랑의 완전한 저묾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랑이 정리되어 가는 끝에서 내가 왜 그를 좋아했는지 생각해 본다. 그와 나는 대화가 잘되지 않았고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보냈어도 어색했고 서로 나눌 대화 주제도 늘 부족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 대화의 시간을 늘려보려 그와 함께 있는 순간 내내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고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에서조차 한쪽에서는 그다음 말을 생각해야 했고 어떤 주제를 꺼내야, 그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그가 말을 많이 할까 고민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되게 재미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뭘 할 때 행복한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도 하나도 가늠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해서 대화하는 순간, 다음 말을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여러 대화 주제로 자연히 흘러가는 서로가 서로의 삶에 통하는 풍요도 없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그 앞에서 허둥대다 후회로 몇 날 며칠을 보낼 때 나는 나의 미숙함이 우리의 관계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와 내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서로에게 편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그 모든 가능성을 내가 다 없앴다고 하염없이 자책했다. 그런데 깨끗해진 마음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고, 우리의 관계를 다시 조명해 보니 그건 나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결이 다른 사람, 통하지 않는 사람, 그저 이쪽과 저쪽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없다. 그냥 그가 좋았고 그래서 그를 좋아했고, 그러다 그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그가 좋아지게 된 이유에 그가 내 눈에 잘생겨서, 자기 일에 열심히라서 그런 이유들이 있지만 그를 좋아한 건 정말 어떠한 이유와 설명도 없이 생겨난 나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순수하게 그를 눈에 담을 수 있었고 그에게서 좋은 점을 하나씩 찾아갈 수 있었다. 그를 통과해 가며 수많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며 아프고 혹독할지라도 그가 나를 완전히 통과하길 기다릴 수 있었다.


  어떤 종류의 사랑과 관계에서건 끝은 냉혹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저묾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죽음이 있기에 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탄생의 생동을 통해 살아 숨쉬는 순간의 찬란을 알듯, 어떤 때의 저묾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사랑 속에서 서로를 향하는 눈동자의 행복을 알고 무수히 엇나가는 시선 속 우리 둘의 시선이 교차할 때의 설렘에 전율할 수 있다. 사랑이 시작되는 찰나의 설렘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험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오래도록, 되도록 진득하게, 그 진동을 느끼고 함께 공명하며 울리고 퍼져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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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사랑을 기다린다. 아픈 사랑의 끝에서,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내 마음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차가워지고 또 조금 울적해진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마음을 여전히 기억하는데 이제는 그를 보아도 공명하지 않는 내 마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내가 남았다. 사랑은 아프고, 사랑은 귀하고, 사랑은 어느 때나 그 모든 것을 이긴다. 나는 그 사랑의 힘을 믿으며 사랑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무용하고 무의미하다고 나직이 되뇌이면서 내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싶다. 그를 보내는 마지막 사랑길을 거의 다 걸어 나온 것 같은 지금 나는 내 앞에 드리워진 이 아픈 장막을 살포시 걷어본다. 짝사랑이 끝난 후의 세상을 아직 걸어보지 못해서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장막 뒤의 그 환한 빛을 믿어보기로 한다. 내가 짝사랑의 세계로 들어와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의 모습을, 사랑의 환희와 찬란 그리고 그 사랑 앞에 전심인 나의 순수와 용기에 대해, 실수하며 허둥대며 그러나 늘 거짓 없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했던 그 모든 빛났던 순간의 나를 기억하며 짝사랑이 끝난 이후의 내 삶을 기꺼이 맞아보려 한다. 내게 언제 다시 사랑이 찾아올지, 전심을 다할 사랑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갑자기 내게 들어올 너를 믿으며 나는, 나를 더 예뻐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야겠다.      


 사랑에 대해 쓸 때면 어김없이 눈이 온다. 그를 생각하다 그에 대한 녹진한 사랑의 말을 쓸 때면 자꾸만 눈이 왔다. 그 눈에 내 마음을 담아 보낸 줄 알았는데 매번 그가 듬뿍 실려 왔다. 그가 내 마음속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나는 휘청이고 무너지고 결국 늘 속절없이 그에게로 빠져들었다. 이제는 그 눈에 사랑의 종결을, 그에 대한 나의 모든 마음을 담아 떠나보내려 한다. 그를 완전히 비워내려 한다. 이번 사랑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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