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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May 06. 2024

지독한 짝사랑의 끝


 그를 보아도 더 이상 마음에 동요가 없었다. 그를 봐서 좋은 마음도, 설레는 마음도,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녹진하게 서글퍼지는 걸까.

 아마도 그건 내가 더 이상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이 사랑이 여기서 끝난다는 것, 내 사랑이 내 안에서만 머물다가 저문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그래도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는 건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 이 마음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이 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 그를 열렬히 좋아했기 때문일 테다. 내 사랑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내게는 슬픔이나 그 끝이 아프지는 않다. 후회 없이 좋아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였으며 무엇보다 내 감정에 스스로 솔직했기 때문이다.

 

 그를 봐도 덤덤한 마음이 어쩐지 이상하고 슬프고 허전하다. 지난 몇 달 동안 내 마음을 가득 채우던 그가 다 빠져버린 이 마음이 나는 어색한 걸까. 아무것도 만져지지도 느껴지지도 남겨지지도 않은 이 마음이 그럼에도 온전한 깨끗함으로 느껴지진 않는 건 나도 그가 빠져나간 텅 빈 내 마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그렇게나 바라고 상상하고 혼자 아쉬워하던 마주침의 순간이 지금에서야 찾아와도 동요하지 않은 내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뒤이어 혼자 설레고, 가슴이 뛰고, 내 모습이 어땠나 곱씹던 수많은 내가 떠오른다. 그렇게 좋아하고 그를 향해 날뛰던 내 마음을 여전히 기억하는데 그것과는 정반대의 아무렇지 않은 내 마음에 정말 사랑은 순간의 감정일 뿐인 건가 되뇌이게 된다. 그러다 관계의 지속성과 사랑의 속성에 대하여, 그 모든 시작과, 관계의 지속과, 끝을 관통하는 '감정'에 대해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를 보며, 나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음, 떠나버린 마음, 꺾여버린 마음을 보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그것이 사랑인지, 나의 전진인지 혼란스럽다가, 언제고 맞는 답은 없다는 생각도 들다가 그럼에도 언제나 내가 1순위인 삶을 사는 게 지나고 났을 때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이겠구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랑이 최고란 말을 계속 믿고 싶다. 사랑의 힘을 믿는다. 내게 임하는 사랑의 힘을 기억한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걸음 속에 사랑이 함께 했으면 한다. 순간의 감정일지라도, 그래서 관계의 끝에서 사랑의 감정을 의심할지라도 나는 계속 누군가를 사랑하고, 표현하고,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헌신과 지지와 아낌을 공유하며 그렇게 나의 걸음을 세상 속으로, 동시에 너에게로 한 발 한 발 떼고 싶다.

 

 내게서 떠난 그가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며 나는 나의 차가움을 직시한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아니어버린 그 사람이 내 마음 한가운데 냉혹하게 서 있다. 정작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떤 타격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는 내 마음에 없는 그가 가여워진다. 사랑받을 수 있었으나 사랑받지 못한 존재, 사랑 줄 수 있었으나 주지 못한 존재, 내가 떠나보낸 너를 나는 왜인지 가여워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너.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닌 너. 충만한 사랑의 경험을 놓쳐버린 너.

누군가에게 한껏 소중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게 사랑인가.

그럼에도 계속 사랑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사랑이 주는 힘을 믿다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는 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를 사랑의 속성에 ‘사랑함의 의미’를 끝없이 고민하는 나이다.


 그래서 어느 때에 사람들은 이별 없는 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건가. 아니 늘 이별 없는 사랑을 꿈꾸며 이 사람이 내게 이별하지 않는 사랑이라 믿으며 시작하고, 끝을 보고, 다시 기대하며 사랑에 첨벙 뛰어드는 건가.

 사랑이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도록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런 사랑만이 의미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랑과 내가 함께 나아가면 사랑을 해도 좋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하는 사랑이,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랑이 그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한순간의 환희와 쾌락, 감정 놀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걸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헤어짐이 사랑의 실패는 아니기에, 헤어지지 않은 사랑만이 사랑의 표본이 될 수도, 사랑의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랑 앞에서 어떤 성공도 실패도 없으며 조건이 붙은 사랑만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헤어져서 귀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사랑도 있고 헤어지지 않아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되는 사랑이 있듯 모든 사랑은 귀하고 가치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나아가게 한다고 믿는다.


 그런 사랑. 사랑 앞에 모든 조건은 무력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때론 내가, 때론 상대가 이끌어주고 밀어주며 함께 걸음을 맞춰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사랑은 윤택하고 어여쁘고 꿈만 같다. 그러나 이런 사랑만이 귀하고 가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늘 이와 같은 사랑을 꿈꾸고 겁 없이 사랑으로 뛰어들지만 실수하고 부딪히고 때론 거부당하며 상처받고 다시 일어선다. 내 마음과 다른 너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나의 지평을 넓히기도 하고 나에게 없는 너의 모습으로 내 한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 주고 어긋날지라도 함께 했던 행복은 계속 거기 남아 있으며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상대로부터 나의 수용범위와 용납의 허용범위를 인지하는 성장이 있다. 사랑과 이별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배움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누군가와 공통의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해진다는 것, 우리 둘만이 나누게 되는 많은 것들에 얽힌 기분 좋은 기억과 감정들, 따스함. 끝이 어떤지 걸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를 일이니까 내가 하는 사랑의 끝이 그때에 지금 내 마음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매서운 것과 같을지라도 나는 언제고 내게 찾아오는 사랑을 거스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받아내고 싶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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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조금 편안하다. 내내 그로 두근거렸던 마음과 외면당했던 마음을 감당하느라 하루에도 수백 번 널뛰기하는 마음이 힘들었다. 닿지 않을 마음이란 걸 알면서도 계속 앞으로만 향하는 마음이 힘겨웠으며 결국 끝날 나의 사랑이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데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끝을 기다리며 이렇게나 좋아하는 마음을 혼자 품고 있는 시간이 때론 어마어마한 고통이 되었다.


 짝사랑의 끝은 평온이라서 나는 어서 그가 나를 통과해 가길 그토록 바랐던 건가.     

 그를 품고 있으며 충만함으로 행복했고 기쁨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그 마음의 크기와 방향을 제어할 수 없어, 거절당해도 계속 너를 향해 질주하는 이 마음이 버거워 나는 어느 날엔 퍼져 버린 타이어처럼 감정에 늘러 붙어 혼미했고, 또 어느 날엔 혼자 울었고, 그러다 너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지는 마음에 어이도 없이 기뻐 날았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 때문에 울었던 나와 그를 보고 좀 전에 흘린 눈물을 새까맣게 잊은 내가 바로 며칠 전에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외사랑의 아득함이 가득했던 순간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그 사람 앞에서 모든 게 괜찮은 내가 있다. 그건 어쩌면 그를 잘 보내주기 위한 나의 마지막 인내와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온전히 비워내기 위해 겪어야 하는 마지막 고통, 차올라 내뱉지 않으면 안 되는 힘겨운 숨을 생이 다해가는 끝에서 내뱉고는 다다를 수 있는 평안. 토해내야 정리되는 마지막 눈물, 차오름.

 

 나는 지금 흔들리지 않고 옳게 서 있다. 내 두 발로, 완전히 내 것인 내 마음으로, 괜찮은 나로 땅을 온전히 딛고 서 있다. 그 감각이 참으로 좋다. 사랑 앞에서 무참히 흔들리다 바로 선 감각. 다시 내 시선이 나로 향하고 내 삶의 중심이 나로 바로 세워져 있는 감각. 사랑 없이도 강하게, 나 자신으로 우뚝 서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 감각이 진짜 행복이라 느껴진다.

 나를 다시 찾은 이 감각이 사랑의 존재를 잊게 한다 해도,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사랑의 필요를 망각할지라도 결국 나는 다시 사랑 앞에 무력해질 것이고 사랑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무참히 흔들리다 절망할 테고 또 어느새 충만함으로 기뻐 환해질 것이다. 다시 찾아온 사랑 앞에서 지금의 이 감각을 잊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늘 그 중심에는 내가 있기를, 사랑으로 무너진 순간에서도 언제나 내가 있는 힘껏 나를 최우선으로 두기를, 사랑 앞에 헌신적인 사람이다가도 나를 잃지 않는 건강한 사람으로 사랑 안에서 한 뼘 한 뼘 자라나길 바란다.


 이십 대에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이 사랑을 아름답게 보내주고 싶다.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줘서 고마웠고, 누군가를 있는 힘껏 좋아하고 사랑하고 품는 기쁨을 알게 해 줘서 감사했고, 사랑이 시작되는 벅참과 저물어가는 슬픔과 그 모든 사랑의 과정을 감당하는 나를 경험할 수 있어 기뻤다. 사랑할 때 충만해지는 나와 사랑 앞에서 사랑으로 용기 있어지는 멋진 내가 있어서 행복했던, 사랑 앞에서 당당으로 열심인 나를 알게 해 주고 사랑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내게 선물해 준 나의 이십 대의 첫 사랑을 아낌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놓아주고 싶다. 잘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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