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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May 01. 2024

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나의 외사랑


 그가 나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내게서 옅어지고 있다고,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지독하고 아린 내 사랑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너무 오래 아프지 않고 끝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그 잠깐의 틈을 이 외사랑은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왔다. 나를 그로 다시 헤집어 놓고 유유히 떠난다. 방심했다. 이 짝사랑의 완패를 인정한다. 나는 그에게 늘 지게 될 것이다.

 그는 나를 한 순간도 떠올리지 않고 그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아침에는 내가 없고 점심에도 없고 저녁에도 없다. 근무하는 틈틈에도 나는 없다. 나는 그에게 고려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를 쉴 새 없이 생각하고 떠올리고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거절당한 내 마음이 느껴져서 매일이 피로하고 아프고 힘겨운데 그의 어느 틈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분명한 사실이 나를 흔들어댄다. 아주 잠깐이라도 별 이유 없이 떠오를, 아주 잠시라도 무심히 궁금해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숨 쉬듯 그를 생각하고 원치 않아도 그가 떠올라 괴로운 나와 대비되어 아프다. 

 

 그를 만나게 될 것이란 사실에 그의 일정을 알게 되며 그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 따위는 아랑곳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와의 만남에 입고 갈 옷을 고려하고 그 만남의 순간을 점쳐보며 여러 갈래로 뻗아나가는 그와의 순간의 경우의 수를 상상한다. 갑작스레 불어난 몸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지 않아 속상하고 거울 앞에 선 내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날임에도 그를 볼 생각에, 확실하게 예정된 만남에 나는 종일 기분이 은은하게 좋다. 

 그 앞에서 자연스러워지자 했으면서, 어차피 끝난 인연 그냥 편하게 있자 하면서도 자주 내 눈앞에 나타난 그로 인해 나는 다시 리셋된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와 친구가 되자는 내 마음도, 더 이상 그를 좋아하지 않으려는 이 마음도 모든 게 없어진다. 나는 그에게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도대체 그가 뭐길래. 내게 뭐길래! 


 그를 만나게 될 거란 사실에 미용실을 하루 앞서 예약한다. 꼭 미용실을 다녀온 날이면 내가 더 예쁘니까, 아무리 내가 손질해도 그 느낌은 그날에 유효하니까 그렇게 그 앞에 서고 싶어서, 그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예쁘다 생각하든 말든 그저 그 앞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나로, 가장 예쁜 나로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까지 새로 하고 그 앞에 나타났으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새로 머리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색해서는 아닌데, 내 각진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고, 살이 쪄서 흐려진 눈이 마음에 들지 않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퉁퉁한 건지 그와 정면으로 마주 서는 게 그만 어려워진다. 자연스러워지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건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랑할 때면 사랑 앞에서 수줍어지고 부끄러워지는 사람이었던가. 그저 나로 서고 싶을 뿐인데 그 쉽고도 당연한 것이 불가능해지고 자꾸만 그의 눈에 예뻐 보이고 싶어서 뚝딱이가 되는 사람인가. 그냥 나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자 평생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자꾸만 뭔가를 보여주려는 내가 있다. 둘이 걸어가며 그가 나를 볼 때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그를 보아야 너를 가득 담은 내 눈을 보여줄 텐데, 그를 마주해야 온종일 너와의 만남만 기다린 내 얼굴을 보일 텐데 나는 자꾸만 얼굴을 숨기고 시선을 앞으로만 향하며 어지러이 떨면서 한 마디를 겨우 내뱉는다. 어쩌다 마주친 그의 두 눈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의 두 눈이 너무 선명해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 저릿하게 아름다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두 눈을 사진처럼 머릿속에 각인한다. 

 

 아 거짓말처럼 또 눈이다. 눈이 온다.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작은 눈송이들이 티 내지 않으며 함박 함박 쏟아진다. 소리 없이 내 마음에 계속 내려앉는 그처럼, 티도 내지 않고 엄청난 무게와 부피로 내게 가득 차는 그처럼 그렇게 눈이 온다. 작고 옅어서 그쳤나 자세히 창문 밖을 바라보면 여전히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거절당해도 계속 일어서는, 계속 그에게로 전진하는 내 사랑 같다. 눈을 보면 내가 떠오르라고 그에게 눈이 오면 나는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해버렸는데, 어쩐지 눈을 보면 누군가가 떠오르는 건 나뿐인 것 같다. 그와 나는 정말 편해질 수 있을까 아니, 그 앞에 선 내가 편안할 수 있을까.


 집에 가는 길에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게 될까, 그럴 수 있을까 자연히 생각이 들며 나는 일찌감치 걷기로 한다. 걸으러 가는 길 아주 잠깐의 틈에 그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 찰나마저도 손에 잡고 싶어 지하철에서 내려 서로 반대 방향의 출구에서 그와 같은 출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라도 그와 조금이라도 더 걸을 수 있을까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그러나 애초에 그와 상관없이 나의 필요로 걷기로 한 이 결정을 지키며 지상으로 올라온다. 그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정신없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지러워하며 팔십 퍼센트의 나로 말을 내뱉는다. 그와 헤어져 그 긴장이 점차 느슨해지면 그와의 대화가 하나씩 분절처럼 떠오른다. 그가 어떤 문장으로 내게 질문했는지, 나는 어떤 말로 대답했는지 그때 내 행동과 표정이 어땠는지, 그가 언제 나를 바라봤고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멈춰버렸는지 이 모든 것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규칙적으로 일시정지되는 장면으로 차근히 재생된다. 계속 다음 상황, 다음 모습이 머릿속에서 진열된다. 하나를 곱씹으면 다음 장면이 내 앞에 등장한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없던 순전히 내 기대였던 그와 같이 걷는, 아니 그가 같이 걸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와 헤어져 혼자가 된 나는 그 앞에서 자꾸만 부자연스러워지는 내가 너무 싫어서 신발을 세차게 구르며 아주 씩씩하게 걷는다. 어쩌자고 자꾸 그가 좋아지는 건지, 그와 나 사이의 매서웠던 시간을 그새 잊은 건지, 왜 그와의 순간을 기대하고 바라는 건지, 그런 순간마다 내게 남는 것은 속상함뿐인데 어째서 그를 놓지 못하는 건지, 그를 놓지 못하는 내 마음이 미웠다. 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움과 내가 사랑받을 사람이란 것에 대한 의심, 왜 나만 이토록 사랑이, 관계가 어려운 건지 모르겠는 슬픔이 한데 얽혀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추위에 점점 빨갛게 차오르는 얼얼함을 그대로 놔두고 깜깜한 길을 여력을 다해 걸었다. 그에게서 비롯된 그러나 끝은 나를 향한 미움과 차가움과 슬픔이 되어 완전한 망연함으로 어둠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력을 다해 걸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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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은 없었다. 거절당한 마음이 나를 향한 곱씸음이 되는 길을 막을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번 사랑은 이번 사랑으로 남겨두어야 함을, 내가 아닌 이유를 그에게 남겨두어야 함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모든 이유에서 나를 찾아 괴롭히는 가장 나쁜 길을 걷고 있는 나였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사랑 앞에서 나는 무지했다. 사랑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고 무지한 나를 인정해야 했다.     


 그 앞에서 자연스러워지고 싶은 이유도 결국 그가 좋아서란 걸 방금 깨달아버렸다. 자연스러울 때 가장 나다운 모습이 나오니까, 그것이 나의 매력이 되니까. 그 앞에서 나의 귀여운 모습이 나오길, 나의 어여쁨이 나오길, 진짜 내가 되길 그래서 그도 나의 귀여움을 알기를 내가 깊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길 바라서임을, 그 이유였음을 알아버렸다. 모든 것에 진심으로 다가가는 나의 이 어여쁨이 어쩌면 친밀함의 벽을 세우는 요인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갑작스레 든다. 이게 나이고, 나 자체로 사람들 앞에 서는 건데 그 모습이 나를 너무 보여주게 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진하고 깊어 쉽게 친밀해질 수 없는 건지, 그들에게 내가 좀 어렵게 느껴지는 건지 혼란스럽다. 이건 나에게도 너무 어려운 마음이다. 그것마저도 크게 곱씹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든 상황이, 모든 대화가 흘러가는 사람이 내 사람, 내 인연인 거겠지.


그가 어서 내게서 떠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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