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초저녁 어스름이 지는 풍경보다 새벽이 밝아오는 하늘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12시를 넘겨서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깊은 밤이 주는 과잉과 자정 뒤에 오는 나 자신과의 대면의 시간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달 카드는 심란한 표정의 발광체 아래로 개와 늑대가 짖고 슬그머니 물속에서 가재가 올라오는, 아무리 봐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구도로 채워진 카드다. 죽음 카드에 등장했던 두 개의 기둥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저 기둥만 넘으면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에 서광이 비쳐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재는 새벽 4시 20분쯤 되는 어둠이 그득하다. 개와 늑대의 출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 다시 출근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원초적 자아가 총출동한 듯 위태롭고 어지러운 느낌을 물씬 불러일으킨다. 특히 가재는 어느 틈에 슬금슬금 다가와 개와 늑대의 발을 콱 물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카드를 두고 ‘당신은 인생에서 가재를 마주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난상토론을 벌이면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올까. 가재는 외부적 위협이 아니다. 늘상 내 안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굴일 들이밀어 나를 압도하는 원초적인 욕망, 자기파괴의 의지와도 같다. 죽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까지 살던 사람이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삶이 선명하게 빛날수록 죽음의 그림자도 짙어진다. 행복은 어쩌면 잃을 것이 최대치로 많아진 상태가 아닐까. 전부를 얻은 사람에게 전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한 마음은 종합선물세트처럼 따라다닌다.
온전한 나 자신과의 대면
무언가에 비추어 보지 않고 나 자신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도의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그저 눈동자를 통해 뚫린 한정적인 시야로 내 손과 발을 인지할 뿐이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녹음기의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내는 목소리를 다른 이들이 듣는 음색과 음성으로 들을 수 없다. 어쩌면 TV 속 자신을 끊임없이 대면해야 하는 연예인들은 다르지 않을까. 그것도 어쨌든 매체를 통한 대면이다. 달 카드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블라인드 스팟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개임과 동시에 늑대이기도 하며, 어쩌면 음험하게 기어 올라오는 가재와도 같다.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나 자신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모두가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생생하게 대면할 수 없더라도 감지는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잔인한 시간이다. 깨어 있는 시간 동안 한 순간도 빠짐없이 주절주절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식의 말로 채워도 나는 100퍼센트에 가깝게 나를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절망 또는 어떤 사랑은 말로 전달되는 영역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고독하다. 나만이 감지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을 지게꾼처럼 부리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끈이 풀려서 와르르 쏟아진 나 자신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다시 모아야 하는 일도 생긴다. ‘이건 빼고 싶은데’ 하면서 나 자신을 이루었던 무언가를 제외할 수도 없다. 안고 가야 한다. 내가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지를 잘 알고 있지만 고결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라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온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기어이 해가 뜬다 해도 다시 밤은 저만치에서 하루만큼의 빛을 내어주고 저녁 언저리에서 나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