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여타의 타로카드가 3차원, 즉 3D라면 그중에서 19번 태양 카드는 마치 홀로 2D인 것처럼 쨍하니 맑다. 고삐도 없는 하얀 말을 탄 벌거벗은 아이는 양팔과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으며, 사방을 비추는 햇님의 직사광선으로도 모자라 돌담 너머에는 빼곡히 해바라기가 피어 있다. 아이가 붉은 깃발을 손에 든 것으로 보아 무언가 결정적인 경사가 있는 기념비적인 순간이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다. 강렬한 태양의 표정은 마치 ‘이 아이에게 털끝만큼의 우환을 선사한다면 내 가만 있지 않으리’라고 하는 듯 근엄한 평온이 감돌고, 하얀 말은 왠지 지쳐 보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가자고 하는 곳에는 웬만하면 달려가 줄 수 있을 듯하다. 카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아이에게 호의적이고, 아이를 보호해주고 있다. 태양은 낮이고 밤이고 적외선, 자외선, 가시광선 등 다양한 형태의 충만한 빛을 뿜어내어 늘 그 자리에서 다시 떠오를 것 같은 든든한 백그라운드로서 존재한다. 인생의 가장 투명한 순간을 클로즈업해서 그 자체로 어떤 오해도, 억측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이가 말에서 떨어진다든지, 해바라기가 곧 시들 것 같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전망이나 우려보다는 정말 티없이 즐거운 한 때다 싶다. 벌거벗은 아이가 이렇게 온몸을 활짝 열어 기쁨을 표현하는데 누가 거기에 먹칠을 하고 싶겠는가. 죽음 카드가 시비를 걸러 와도 ‘내가 졌소’ 하고 돌아갈 것 같다. 앞서 살펴본 별 카드의 석연찮은 희망과 달 카드의 찌뿌둥한 불안이 일거에 해소되는 듯하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역사가의 고뇌 같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지만 어떤 역사는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면?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12세 이하 관람불가, 18세 이하 관람불가 같은 식으로 문화콘텐츠를 받아들이는 데 제한을 받는다. 왜 그럴까? 차라리 아이들에게 ‘사실 우리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어’ 하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한때 ‘아이들이 어찌저찌 해서 지구를 구하는’ 만화에 대한 염증이 좀 있었다. 그런 만화를 즐길 때쯤에 나는 아이였으나 지금의 내 모습을 만화에 투영시켜 보면 나는 어쩌면 만화 속에 나오는 아이를 괴롭히고 지구를 위태롭게 하는 악역에 가까워졌다. 아무도 안 볼 때 일반쓰레기 봉투에 에라 모르겠다 소량의 플라스틱을 섞기도 하고, 살인이나 절도 등을 다룬 사회면 뉴스를 봐도 매일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세상이 어느덧 당연한 듯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이에게 좋은 우리 편과 나쁜 악당이라는 구도의 콘텐츠를 제시하고 좋은 우리 편은 우여곡절 끝에 항상 이기게 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은 인생을 헤쳐나가는 데 얼마만큼의 도움이 될까.
지구 관점의 법석을 조금 지양해 봅시다
태양 카드 자체는 더없이 완전무결하다. 하지만 이런 순도를 획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카드들에서 고뇌와 눈물, 절망이 뒤따랐는지 아이는 모른다. 나는 두 갈래의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계속 모르게 해서 아이가 아이들만의 유토피아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다른 하나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우선 팬티부터 입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타로점을 볼 때 태양 카드를 마주하게 되면 어쨌든 ‘지금을 즐기세요’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게 되지만 1차원이든, 2차원이든, 3차원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니 아이도 언제까지나 아이일 수 없고, 태양은 아이를 위해 뜨지 않았다. 사실 뜨거나 가라앉은 적도 없다. 낮도 밤도 꽉 찬 빛이다. 이 시간은 한국이 밝을 시간, 저 시간은 영국이 밝을 시간이라 태양이 움직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