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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Oct 23. 2024

20. 심판 카드: 소급 적용되는 구원에 대하여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일어나세요. 죽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때가 무르익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팔을 불고 관짝에 누웠던 사람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하늘을 우러러본다. 바야흐로 심판의 순간이다. 심판 카드는 ‘우리 편은 천국, 남의 편은 지옥’과 같은 식의 단순한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산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죽은 사람까지 샅샅이 뒤져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한 번씩 내 나라와 주변국 단위에서 큰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나는 깊은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수많은 사망자가 생겼던 쓰촨성이나 동일본 대지진, 물고기를 비롯한 바다생물의 수난을 불렀던 태안 기름유출 사건이라든지, 단지 운 나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닌 스케일이 있는 재난은 운명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를테면 그들 각자 사주팔자도, 별자리도 달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에 그렇게 스러져 버렸을까 싶다. 그럴 때면 힘을 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인데 영화 중에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스르르 몸을 일으켜 살아나는 모습을 연출한 구간이 있다. 지금은 줄거리를 다 잊을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마주한 씬 하나로 나는 마치 내가 구원을 받은 감동을 느꼈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메이저 카드에서 마주했던 여정도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다. 21번 세계 카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가 이 카드에 달렸다.      



죽으면 끝일까

자로 재는 직선의 삶에 드는 반기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고 다양한 삶의 태도를 보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죽음’이 석연찮았다. 단번에 모든 걸 끝내고 싶은데 왠지 죽음은 답이 아닐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 삶의 시작도 온통 주체와 객체가 뒤섞인 불투명한 끌려나옴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게 다 뭔가?’ 하는 의식이다. 어쩌다 보니 살아있다는 감각. 그러니 언젠가는 어쩌다 보니 다시 죽겠지만 그것이 온전히 칠흙같은 멈춤과 정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다녔다. 지금 꾸역꾸역 지속되고 있는 삶의 다채로운 파노라마에 비해 죽음은 너무도 미지의 경험이라 ‘티벳 사자의 서’ 같은 콘텐츠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내가 도피했던 곳은 ‘해탈’이었다. 불교에 기댔다. 죽음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찌뿌둥한 감각은 생사의 고리와 윤회의 업장을 허무는 해탈이라는 현상으로 그럭저럭 위안을 받았고, 다양한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일상이 엉킨 실 정도가 아니라 이중 삼중의 쇠사슬 같았던 시기에 큰 힘을 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나는 심판 카드의 순간이 오기를 열렬히 바라는 입장이다. ‘그래 어디 한번 뇌 CT부터 장 내시경까지 한 번에 받아보자, 뭐 어떤 게 나오는지’ 하고 나를 시험에 드는 순간으로 내던질 수 있다. 언젠가 내가 버린 바나나 껍질에 누군가 미끄러져 죽고 말았다면 그 죗값을 치를 수도 있다.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꿈꾸는 것도, 종교 간의 길고 짧은 것을 대보자는 뜻도 아니다. 그저 오랜 시간 삶이 온전하지 않았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뻥 뚫리는 나팔 소리 한 번은 들어보고 죽고 싶다. 나팔소리는 직장의 승진 또는 해고를 알릴 수도 있고, 관계의 급진전이나 급소강을 알릴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이 카드의 얄짤없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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