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밤하늘의 별은 누군가에게는 전 우주에서 지구가 유일하게 생명이 활성화된 행성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를 굽어 살펴주는 초월적 존재의 상징으로도 느껴질 것이다. 내게는 어땠지. 상투적이지만 별이란 빛이 도달하는 시간의 격차로 인해 지금은 이미 사라졌을지 모르는 무언가의 잔상이나 허상일지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이미지가 크지 않았던가. 불꽃놀이를 즐기지 않는 이유도 장렬하게 터지는 불꽃이 점점이 스러져 가는 것이 어째서 축제가 될 수 있지? 싶은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다. 생화를 꽂아두고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개구지게 뛰어서 도망가는 길냥이를 마주했을 때의 마음도 그렇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그 자체로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마치 진시황제의 말년 같은 이 심성은 몇 번의 연애와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쪽으로 변하는 듯했으나, 다시 별 카드를 마주한 나를 보면 결국에는 조금도 변하지 못했음을 느낀다. 희망을 말하는 카드를 보는데 이렇게 속절없을 수가 있을까. 뒤에 나올 달 카드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별들이 쾅쾅 박혀 있는데 어째서 조금도 드릉드릉하는 실질적인 희망과 기대가 솟아나지 않는 걸까. 차라리 이 카드의 별빛을 술집 간판의 네온사인이 내는 빛으로 교체한다면 적어도 하룻저녁 즐거운 술자리를 기대할 수는 있겠다.
한창 타로카드 강의를 들을 때 선생님이 별 카드와 달 카드를 들어 ‘삼재 카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고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을 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카드를 마주했을 때의 막막함과 잘 어울리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잘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별 카드가 나온다면 단칼에 ‘희망이 있어요’라고 말하기가 힘든 것은 별 카드에서 말하는 희망이란 행운이나 요행을 배제한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거대한 쳇바퀴가 흘러가는 가운데, 그래도 그중에 좋은 날이 있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듯한 거대한 원리로서의 희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지’라는 말은 1년치 시간을 선결제해서 급행열차라도 탄 듯이 흘려보낼 수 없는 우리에게는 맞는 말이기는 해도 결정적인 위로가 될 수는 없다. 가끔 인생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던, 그때조차도 나는 ‘곧 지나갈 스포트라이트’라고 유한성을 의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리즈시절이라고 할 만한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다시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이제는 더없이 초라해진 것 같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몽상과 상념에 빠뜨리는 그 영광의 순간들은 나에게 얼만큼의 순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이정표가 되거나, 가보처럼 안고 지내다가 그대로 묘지석이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