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이 카드가 나타내는 힘은 갑을 관계에서 ‘을’에게 명령권을 행사하는 ‘갑’으로서의 상대적인 우위가 아니라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이고 총체적인 완성형 권력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점치는데 이 카드가 뜬다면 단순히 ‘자존심이 세고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 타입’이 아니라 상대를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내 것이 맞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복잡한 유기체는 자유로이 흐르는 생각과 사상까지 통제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항상 ‘딴 생각’을 하지는 않을지 지배 주체의 입장에서 불안과 의심이 동반된다. 애초에 스스로가 완전한 통치와 지배라는 게 잠시 때가 맞아 그런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영속적이고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다.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면 발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씁쓸한 진실 중 하나는 배려할수록 일이 많아지고, 존중할수록 만만한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계를 조율하고 이어가는 능력이 본능적으로 발달한 영민한 사람들은 적재적소에 안전하게 으르렁거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 굳이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구체적인 대사와 함께 정색할 필요가 없다. 그저 발화되는 문장의 마지막 한 글자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정갈하고 살벌한 태도면 웬만큼 둔한 이가 아닌 이상 상대에 대해 ‘그냥저냥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군’ 하고 감지한다. 말을 끝까지 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지만 사람이 위축되면 한 문장을 일정한 톤으로 끝맺음하기가 쉽지 않다. 뒤로 갈수록 꼬리가 스르르 내려가거나 이미 나의 열세를 알아차린 상대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말을 자르면서 치고 들어온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는 그래도 된다’라는 모종의 판단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좀 쎄’ 하고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아주 직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차라리 덜한 대접을 받더라도, 상대가 사람을 가려가며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포착한 것으로 의의를 삼는 편이다. 그러니 내가 대체로 동네북인 건가.
그리고 내 뒤로는 아무도 없지
오래전 <노블레스>라는 웹툰에서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라는 대사가 나온 뒤로 온라인 상에서 한동안 인상 깊은 컷으로 회자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압도적인 차이로 ‘깝치는’ 누군가를 제압할 때 우리는 공통된 쾌감을 느낀다. 물론 대등하거나 아슬아슬한 실력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힘겹게 쟁취하는 월드컵 4강전 시합 같은 승리가 주는 희열도 있지만, 어느 날 하늘에서 양팔에 날개를 단 축구선수들이 내려와 지상의 1등 팀을 단숨에 제압한다면, 그리고 그 ‘날개팀’이 아군이고 내 편이라면? 그만한 고양감도 없을 것이다. 황제 카드를 카드의 100배 정도 되는 면적만큼 전후좌우 사방으로 이어붙이기 한다면, 과연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일단 황폐한 돌산을 아무리 넓혀도 푸른 나무 한 그루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포화와 전쟁으로 이미 베어지고 시들어버려 다시 씨앗을 뿌리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또한 황제의 바로 앞에는 권능에 도전하려다 참수형을 당한 이들의 시체가 일종의 ‘전시효과’를 위해 널려 있을 것 같고, 그 앞에는 온통 무릎을 꿇거나 조아리는 사람들이 가득할 듯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제의 뒤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황제는 자신을 지키는 명을 받은 수행원 내지는 보디가드조차 믿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로초를 찾아헤매고 있을 것 같은
4번 카드에서 황제가 입은 옷은 3번 카드인 여황제가 입은 석류무늬 펑퍼짐한 원피스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무릎에 걸쳐져 있는 붉은 망토도 왼쪽 다리는 살짝 걷어 올린 상태인데,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반듯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짝 골반이 틀어져 보인다. 100미터 달리기의 시작을 앞둔 준비 자세처럼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달려나갈 것만 같다. 게다가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눈빛에서는 일말의 의연함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황제는 다음 두 가지 상황 중 하나에 처한 것 같다. 첫 번째는 이제 막 권력을 차지한 뒤 ‘추가로 덤빌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건국전쟁을 멈추지 않은 상태. 두 번째는 레임덕, 즉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이 찾아오기 직전에 권좌에서 내려갈 시간이 다가온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으나 애써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 두 상태 모두의 공통점은 지배욕을 실현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영속성까지는 지배하지 못했다는 점. 황제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사랑도 자아도취도 아닌 것 같다. 그저 ‘영원한 시간’만이 4번 카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 없기에 황제 한밤중에 모기가 날아가는 소리만 들려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호신용 칼을 쥐고 눈을 부라릴 것 같다. 황제의 쉼 없는 삶이 조금 안쓰럽다.
시작은 사랑이었다고 믿고 싶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다스베이더가 등장할 때 흐르던 음악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두 다리와 팔을 잃고 전신이 타들어가게 되었는지도,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했을 때 그걸 지켜보면서 커다란 빙산 하나가 무너지는 것 같던 내 마음도. 사랑해서 지키고 싶었던, 그 수단이 ‘포스의 어두운 힘’이 되고 말았던 희대의 캐릭터와 4번 카드 속 황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무나 과분한 일일까, 아니면 황제의 노고를 오해하고 저평가하는 일일까. 아무리 봐도 황제 카드 속 인물은 일종의 세습제로 권력을 이어받은 것 같지 않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태어나는 순간 머리 뒤에서 후광이 짠 하고 빛났고’ 하는 식으로 서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자수성가형 권력자라는 가정을 해보면, 황제가 결국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의 간절함이나 목표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직도 최고의 투지와 출력을 내는 힘의 근원으로 ‘사랑’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황제가 사랑했던, 그래서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