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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Jun 01. 2024

5. 교황 카드: 혹시 지금 면죄부 단가 협상 중?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3대 짬뽕 맛집, 돌려차기 4대 천왕 하는 식으로 타이틀을 붙여 권위를 확보하려는 귀여운 시도를 좋아한다. 나 역시 취향을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나다움’을 구성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물을 편애하고 그 사실을 주위에 알리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물의 맛은 아이시스 8.0이야’ 하고 이 물 저 물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물맛 좀 아는 사람 행세를 하기도 하고, 얼마 전 동묘 근처에서 양꼬치를 먹으면서는 ‘이 맛은 인생에서 가히 세 손가락 안에 들겠는걸’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5번 교황 카드를 보면 그간 잠시 글쓰기가 뜸했던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에게 14번 절제 카드(TEMPERANCE), 18번 달 카드(MOON)와 함께 교황 카드는 단연 밉상 3인방 중 하나인 카드다. 세 카드의 공통점은 실제 리딩에서 ‘뭐 어쩌라고’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잦은 이사, 과로 등 여러 일들이 겹쳐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5번 카드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 그간의 공백도 어쩌면 교황 카드의 밉상력이 보태졌기 때문일 터, 하지만 이제는 이 카드와 대면해 보자.



교황님 T세요?

여사제는 F라던데요



교황 카드는 흔히 2번 여사제 카드나 4번 황제 카드와 비교된다. 여사제 카드도 등 뒤로 두 기둥이 굳건히 배경을 채우고 있는데, 여사제가 장막을 드리우고 신비한 지혜를 전하는 데 반해 교황 카드는 발아래 사람을 두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사제가 I라면 교황은 E다. 한편 4번 황제 카드는 자수성가형 1인자답게 자신의 힘으로 지상의 권력을 쟁취한, 적어도 그렇게 했다고 믿는 불안한 폭군 같은 면모가 있었다면 교황에게는 신의 가르침과 말씀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다. 사람으로서 가지는 리더십의 무게와 불안이 부각되는 황제가 F라면 신성을 등에 업고 변치 않는 진리와 신성을 전하는 교황은 T일 수 있겠다. 하다 하다 MBTI가 카드 글에까지 침투해올 줄은 나도 몰랐지. 그저 전반적인 느낌을 주관적으로 전하기 위한 도구일 뿐.



선악의 저편 아니고 이편

전통과 도덕에 대한 존중



본가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휴대폰으로 작게 틀어놓은 유튜브 방송을 본의 아니게 유심히 듣게 된다. 그때마다 막막한 정치적, 심리적 장벽을 느끼곤 하지만 베트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80에 가까운 아버지가 ‘당시 한국 군인이 얼마나 잘 싸웠는지’ 등에 대한 콘텐츠를 아직도 즐기고 마음에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는 그것을 감히 ‘아버지의 전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편 나의 전통은 대학 때 철학과 강의를 잠시 동냥하듯 들으면서 개괄 및 발제를 맡았던 철학자가 하필이면 ‘니체’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기반은 ‘선악의 저편’에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 판을 짜려고 했던 니체의 통찰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교황 카드를 보면 반항심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선악의 ‘이편’에 있는 교황 카드는 아마도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고 그에 따라 인류가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할 전통과 도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삼중관을 쓰고 세 개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강렬한 무대장치를 활용해 선악의 이편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대원칙을 ‘신(GOD)’이라는 백그라운드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몰랐어? 나 이슬만 먹고 살잖아

사소하고 잔잔한 삶의 위선들



교황 카드는 좋게 해석하면 절대자의 진리에서 도출된 삶의 지혜, 도덕, 규범 등을 지켜가려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자칫하면 위선과 기만으로 내로남불, 강약약강 등의 과오를 저지를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의 말씀을 받들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적당히 편집하고 가공해 부당한 이득을 챙길 수도 있고, 신의 가르침을 가볍게 무시하고 권력을 악용하면서 ‘이 또한 신의 가르침일지니’ 하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면서 뒤에서는 상다리가 휘어지는 12첩 반상에 백성의 고혈로 짜낸 포도주를 입가에 줄줄 흘리면서 들이킬 수도 있다. 스케일이 크면 사고도 크게 친다. 하물며 신의 중재자 내지는 대리자 역할을 하는 스케일이면, 손짓 하나만 잘못해도 그 파장이 얼마나 클 것인가. 파티션 속에 숨어 몰래 코를 파다가 거울을 탁 닫고 일어서서 ‘오늘도 나는 내 삶을 프로페셔널하게 산다’는 표정으로 회의실로 향하곤 하는 나는 그 어떤 잔잔한 위선과 기만을 부리면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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