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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번의밤 Mar 12. 2024

2. 여사제 카드: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지금은 거의 텅 빈 내 책장에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하우게의 시집이 있었다.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 괜히 와닿아서 책장에서 꺼내 표지만 보고 다시 꽂아 놓곤 했는데 2번 카드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여사제에게서 ‘내게 진실의 전부를 묻지 말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말라는 시인이 있고, 진실의 전부를 묻지 말라는 여사제가 있다. 둘 중 한 사람과 하룻저녁 대화를 해야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인가. 최근의 나라면 여사제를 택할 것 같다. 진실의 전부를 이미 알아버린 것 같은 치기로 ‘또 뭐가 남았나’ 싶은 오기로 감히 ‘얼른 내놔 봐요, 그 진실. 얼마나 더 있나 보게’라고 반항하고 싶다고나 할까. 한편 카드를 펼치다가 이 카드가 나오면 솔직히 하나도 반갑지 않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언지 모를 일들이 유보되고 돌려 돌려서 거절을 당한 것 같다.     


 


             

신비라는 알의 껍질

깨고 보면 다 계란이다



계란이 특별히 맛있을 리도 없고, 맛없을 리도 없다. 나는 신비라는 게 마치 계란 같다. 도통 말이 없던 고교 동창은 졸업식 이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딱 한 번 나에게 ‘나는 너를 미워하고 질투했어’라는 말을 했다.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 말을 취소하고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하겠지만. 어쨌든 친구가 나에게 민낯을 드러낸 순간 내가 품고 있던 그 말 없던 친구에 대한 신비가 깨어졌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곧잘 신비를 깨고 다닌다. 괜히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먼저 밑천을 내어 놓고 속 없는 모습을 보이거나 방정을 떤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여사제가 전혀 ‘정숙’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잘생긴 계란 같다. 그걸 깨는 순간 옆집 언니처럼, 아랫집 동생처럼 그렇게 다가오겠지. 하지만 한 장의 카드 속에서 언제까지고 신비감을 지킬 것 같은 여사제는 과연 무슨 비밀을 품고 있을까.      



비밀은 없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니체는 선과 악의 속옷을 벗긴 철학자다. 따지고 보니 이놈의 ‘착하다’는 표현이 굉장히 편협하기 짝이 없는 거다. 여러모로 젊은 시절에 좋아하기 좋은 생각이다. 나는 여사제 카드를 뒤흔들다 보면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젖는다. 천사가 가도 흠... 악마가 가도 흠... 하고 대답을 아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신뢰가 가는 카드이고, 카드를 펼치다가 이 카드가 나오면 하나 마나 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이 있어’ 같은. 그렇지만 우리는 매번 치열하게 다가가서 그 심심한 진리와 마주치지 않던가.      



양극을 품는다는 것

흑백의 기둥을 등지고 초승달을 품은 여인의 사정



여사제 카드는 ‘보아즈(Boax)’와 ‘야긴(Jachin)’이라는 어둠과 빛의 기둥을 등지고 앉아 있다. 그리고 잘 익은 석류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 부활을 의미한단다. 사실 ‘석류’의 비유는 좀 억지 같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흑백논리를 상징하는 듯한 두 기둥은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인다. 여사제는 왼쪽 어깨에 빛을, 오른쪽 어깨에는 어둠을 감당하고 있는 셈인데, 세상의 모든 이들은 대체로 빛과 어둠 중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여사제를 만나러 오는 많은 중생들이 오로지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려고 할 때 여사제는 아무래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양극을 품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렇다고 하소연하면 저런 판례(?)가 떠오르고 저렇다고 하소연하면 이런 판례가 떠오른다. 고생이 많다.     



종교에 환상 없음(feat. 카톨릭 계열 고등학교 졸업생)

여사제의 자기관리, 파이팅




수녀님이 ‘철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덕에 수녀님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다. 더불어 ‘신부님’이라는 존재도 얼추 수녀님이 성심껏 보좌하는 그런 역할인 만큼, 그들도 그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다만 신성을 향한 인격 도야에 열심인 사람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나에게 여사제 카드가 ‘아이고 성스러운 분, 그러셨습니까’라는 뉘앙스로 읽힐 리 없다.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 날, 시장에 나가서 그저 걷다 오던 생각이 난다. 시장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고, 생선을 팔거나 붕어빵을 팔거나 소고기를 팔거나, 그들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 순간 어느 불상이나 성상을 본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나는 여사제가 벌떡 일어나 ‘돌돌이’로 옷에 묻은 먼지를 한참 제거하다가 도로 앉는 광경을 상상한다. 왜냐하면 여사제가 입은 옷이 너무나 하얗고, 걸친 가운이 너무나 푸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생에서 그런 청결함을 유지하려면 부산스러운 걸레질이 수반되어야 한다. 여사제는 천사가 아니기에,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시간을 품고 있을 것이다. 보여주지 않는 시간을 못 헤아리는 척하는 것도 예의라면 예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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