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돌려다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핸드폰 벨 소리가 마음을 밀치며 들려온다.
“여보세요, 여기 요양원보호사예요. 어머니께서 아드님과 통화하고 싶다네요. 연결해 드릴게요.” 전화가 왔다. 나는 얼른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오늘따라 밝은 모습으로 어머니가 화면에 나타났다. “엄마, 잘 계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응 그래, 나는 잘 있다. 애기들은 별 탈 없이 잘 크냐?”우리 딸들이 낳은 증손자들이 잘 있는지부터 물으신다. “여기 있는 선생님들이 잘해주니 나는 걱정 없다. 너도 아프지 말고 잘 있어라.” “네 엄마, 며칠 있다 뵈러 갈게요. 밥이랑 잘 드시고 잘 주무세요. 어디 아픈데 없지요?”“응, 허리가 조금...”하시며 말을 끊으신다. “보호사님, 우리 엄마에게 파스 한 장 붙여주세요.”“보호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렇게 서로 아쉬움만 남기고 짧은 영상통화를 마쳤다. 요양원 3층 팀장님은 가끔씩 우리 엄마가 잘 지내고 계시다고 소식을 전해 주시는 고마우신 분이시다.
그녀의 말로는 어머니께서 늘 큰아들만 보고 싶다고 한단다. “우리 진주, 이쁜 아들 진주가 보고 싶네.” 보고 싶은데 온다고 하더니 왜 안 오냐고 하신단다. 점점 인지능력이 떨어지시는 엄마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멍해진다. 요즘은 유독 나를 기다리신다고 한다. 집에 계실 때는 무표정하시고 다정다감 하시지도 않았던 우리 엄마는 점점 애기가 되어가고 있다. 정신이 멀쩡하셨을 때는 차가울 정도로 냉철하신 분이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한동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늘 무덤덤하고 자기 성깔이 남다른 우리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살아가실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뒤돌아 보면 우리 엄마는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더없이 마음 따뜻한 분이시다.
우리는 원래는 5남매였으나 지금은 삼 남매 형제자매다. 그중에 내가 둘째요, 큰아들이다. 위로 누나가 한분 계시고 아래로 한참 터울이 있는 남자 동생이 있다. 내 밑으로 두 딸은 가슴에 묻었다. 두 번째로 딸을 잃고는 담배를 피우시며 영혼 속에 타들어가는 화를 내뿜어 내시곤 했었다. 그런 우리 엄마는 평소에도 나에게는 남다른 애정과 신뢰를 보였지만 나이 드시고 아버지 안 계시니 나를 의지하는 마음이 점차 더 해지는 것 같다.
나는 30년간의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직장에 매달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성실한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았다. 그 가치는 나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라 할 만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나는 퇴직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도 뭔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름 준비를 해 왔다. 그래서 퇴직 이후에는 흔히 말하는 “자유”를 위한 나의 삶을 꿈꿔왔다. 어쩌면 인생살이가 노예생활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생각만큼 퇴직 이후의 새로운 환경 앞에서 좀처럼 부자유함이 걷히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한때는 우울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은 아니지만 달라진 낯선 환경에 홀로 서 있는 그런 기분이랄까. 왠지 느끼게 되는 소외감과 존재감 없음은 당장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 초조함이 모처럼 누리게 된 자유를 무색하게 했다.
퇴직 후에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찾고 그동안 못했던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누구에게 구속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운명의 시간들을 오직 나에게만 제공하고 싶었다. 마음껏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그동안 멈추었던 글도 쓰고 서예도 하고 식도락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퇴직 시점에 갑자기 발현한 코로나19가 변수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비이락”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하필이면 내가 퇴직하니까 때를 맞추어 나타난 코로나19는 3년이 지난 오늘까지 심각한 위기로 이어져 모든 삶과 환경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시니어로 분류디어 시작되는 인생 2막은 나를 위하고 인생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에 더 자유롭고 즐겁게 나아가고 싶었다. 온라인상에서는 사회에 재도전을 원하는 자에게 필요한 강의를 자유롭게 듣고 공부하며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끌리게 되었는지 문학심리상담사, 학교안전지도사, 캘리그래피, 전기기능사에 도전하여 라이선스를 취득하였다. 이어 대면 교육을 통한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평생교육원 강사자격도 취득했다. 또 국민취업지원제도 프로그램을 통해서 학원수강을 통해 커피바리스타 자격증취득과 라테아트까지 훈련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새로운 일에 나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희망의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나에게는 두 딸내외와 다섯 명의 손자가 있다. 나는 최소한 아이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행복한 노년을 살아가고 싶었다.
이런 나는 알지 못했다. 우리 엄마가 나의 퇴직을 기다리고 계셨는지를...
아버지 돌아가시고 8년째 홀로 별 탈 없이 생활하고 계시던 엄마가 나를 조금씩 필요로 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눈꺼풀이 짓무르고 아프다. 언제 올래?”해서 군산집에 눈에 염증이 심해서 눈 주위가 빨갛게 짓무르고 눈을 뜰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셨다. 안과에 모시고 가서 진료를 하니 염증이 심해서 그런다고 소독을 하고 안약을 처방해 주셨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머리 염색약의 부작용인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좀처럼 잘 낫지를 않았다. 매일같이 전주에서 군산으로 다니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안과 치료를 해 나갔다. 치료과정에서 의사 선생님이 “백내장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니 더 늦기 전에 백내장수술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네, 그래야지요. 눈병이 나으면 어머니 설득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했으나 한 고집하시는 엄마는 백내장 수술을 절대로 안 하시겠다고 했다. 어느 정도 안과치료가 다 되어갈 때쯤 또 잇몸이 아프고 이가 흔들린다고 하셨다. 치과 치료도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버티어 오던 오래된 틀니가 염증으로 인해 그나마 지지했던 앞니 두 개도 발치를 해야 했다. 원래 틀니가 있었으나 불편하다고 착용도 안 하셨다. 치과의사는 그래도 이빨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라 틀니를 꼭 해야 한다고 권했다. 윗니는 전부 발치하고 아랫니 4개를 기둥으로 위아래 틀니 공사를 시작했다. 전주에 사는 나는 병원의 치료 계획에 따라 몇 달에 걸쳐 이틀이 멀다 하고 군산에 다녀와야 했다. 다행히도 설득한 끝에 틀니는 하시겠다고 허락해서 마무리는 했다. 매일 드시는 음식도 이제는 내가 도와줘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맞춘 틀니도 지금은 하지 않으시고 지내신다. 그냥 잇몸으로 음식을 드시며 이대로가 좋다고 하신다.
나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엄마가 측은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자식 된 내 몫이라 생각했고 이왕이면 하게 되는 일들을 즐겁게 해야지 생각했다. 엄마 본인은 더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백내장이 시나브로 심해져서 시력 저하로 일상에 어려움이 생겼다. 수시로 군산집에 다녀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식탁 밑에는 밥알이 떨어져 있고 반찬도 흘려 그것을 밟고 다니시니 방바닥이 여기저기 얼룩지고 싱크대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백내장 수술을 권하고 달래 보았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하신다. 전에 아버지께서 백내장 수술하시고 많이 불편해하시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간절한 부탁에도 완강하게 거부하시니 어쩔 수가 없어서 일단 시간을 두고 안과 치료만 받고 있다. 고집스러운 엄마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이런 엄마를 언제까지 저런 모습으로 홀로 지내시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나는 거의 매주 안부확인차 요양원에 면회를 간다. 때론 영상통화나 전화를 하고 있다. 혹시라도 바쁜 일이 있어 어쩌다 전화를 못 하게 되면 요양보호사께 부탁해서 내게 전화를 거신다. “어디 아프냐? 네가 보고 싶어서 내가 해달라고 했다. “아야, 나는 너 무슨 일 있으면 못 산다” "시간 나면 한번 왔다 가거라." 하신다.
만난 지 10분이면 “어서 가거라, 나는 괜찮다. 여기 생활이 나쁘진 않다. ”하신다. 그래도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요양원 원장님을 면담했다. 원장님은 “그동안 지켜본 결과 노인성 치매가 조금 있으나 활동적이고 긍정적이시라 같은 방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신다고 했다. 흥이 많으셔서 노래도 잘 따라 하시고 춤도 추신다고 했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매주 수요일 입소자 예배 때는 꼭 참석하셔서 예배를 드리신다고 전했다. 우리 엄마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나는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몇 년 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왔고 병원치료를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어 형제들끼리 의논하고 고민하다가 드디어 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던 요양 시설에 가시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직접 모시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못난 자식이 괴로워하며 결정 허게 된 요양원으로 입원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지금도 나는 마음 부끄럽고 씻을 수 없는 죄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지만 우리 집에 모셔서 요양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나 혼자 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과 생활환경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야 했기에 불가불 선택이었다. 지금 계시는 요양원에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의 상태는 놀랍게 회복되셨다. 일상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고 보호사들과 원만하게 생활하게 되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 아픈 일은 최근 기억이 점점 짧아지는 노인성 치매를 앓고 계시기 때문이다. 눈은 침침해도 견딜만하다고 하니 현재로는 다행스럽다. 요양원에 보호사들은 우리 엄마가 참 예쁘다고 하신다. 입소자들과 소통도 잘하고 흥이 많으셔서 프로그램을 할 때는 박수도 치고 춤도 추신다고 한다. 말도 너무 예쁘게 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모두들 좋아하신다고 한다. 가끔씩 담당 요양보호사님께서 영상통화를 연결해 주기도 하니 한층 마음이 놓인다. 그렇다고 어찌 안타깝고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우리 엄마는 젊은 시절 어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지독한 가난과 생활고에 힘든 세월을 살아오셨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조개 혓바닥에 칼을 들이밀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시절이 서글프다고 늘 말씀하셨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겨우겨우 버티던 시절에 병원도 못 가고 두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기억들도 한으로 남아있다. 그런 엄마는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웃으시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늘 우울해 보이고 심기가 불편한 듯하여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 길고 질긴 한평생 가슴앓이를 담배연기로 뿜어대며 살아오셨다. 어느새 90세를 두해나 넘으셨다. 틈만 나면 아파트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고 창밖을 내려다보고 계시던 어머니다. 오랫동안 입에 붙이고 살던 담배도 요양원에서는 피울 수 없으니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금단현상 없이 담배도 끊으셨다. 가끔 찾아오는 나를 보면 “빨리 죽어야 하는데, 너 고생시키면 어떻게 한다냐”하셨다. 이제 울 엄마의 기억에는 20대 처녀 때로 국한되고 자꾸만 시집오기 전 살던 고향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그나마 힘들게 살아오셨던 기억들은 지워버리셨으니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자식들은 잊지 않으셨으니 감사하고 있다.
설날을 앞두고 우리 삼 남매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하여 식탁에 앉았다. 우리 엄마는 요양원에 입소하면서부터 입에 달고 부르시는 노래가 있다. 오늘도 차에서, 식탁에서 치매노인처럼 부르는 노래 가수 현철이 부른 "청춘을 돌려다오"를 주변 의식하지 않고 부르신다. 요양원에서도 가장 흥이 많으신 어머니로 유명하다. 늘 아들자랑하시며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를 두 손을 펼치면서 부르신다. 나는 이런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곧 다가올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생 제2막은 무슨.. 내가 살아가는 곳곳에서도 이젠 노인으로 분리되어 안타깝고 때론 속상하기도 하지만 어쩌랴.
하나 둘 여기저기 고장 나고 삐그덕 거리고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함에 빠져 들어가는 내 인생의 아쉬움을 무엇으로 채워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울 엄마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의 애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