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들 모두 모두 화이팅~~~"
날씨는 연일 두꺼운 바람과 함께 찬 공기를 몰고 다니고 며칠간 쌓인 눈덩이들이 한구석에 모여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녹아들 때 쯤, 셋째인 막내딸도 드디어 군 입대를 위한 막바지에 들어갔다.
첫째 아들은 학사장교로 3년째 해병대에서 근무 중이고 둘째는 ROTC를 하다가 사정이 있어 그만두고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들어간 상록 예비군 훈련 부대에서 육군 병장으로 다시 병역의무를 하고 있다.
둘째 아들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막내딸까지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보내려고 하니 마음 한구석에서도 이미 몇 달 전부터 싱숭생숭 허한 바람이 불어댔다.
막내딸은 대학교 다니는 동안 육군에서 ROTC 훈련을 받다가 큰오빠를 따라 해병대로 바꾸는 바람에 임관하기 전 2주 동안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장’에서 유격훈련을 받았다.
큰 아들이 포항에서 근무하느라 몇 번 찾아갔었는데 눈도 별로 안 오고 따뜻한 지역이라는 선입견에 '그나마 날씨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훈련받는 내내 전국적으로 바람이 거세고 기온이 매우 낮았다.
2025.2.21.
오늘은 대학교에서 딸애의 '졸업식과 학군장교 임관축하 행사'가 함께 있는 날이어서 우리도 마음이 바빴다. 하루 전에 포항에 미리 올라와 큰아들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딸아이의 훈련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경산에 있는 대학교로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많은 가족들이 그동안 고생한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문에서 한참을 대기하고 있었다. 해병대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막 나온 젊은이들이라 모두들 목소리나 모습에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훈련소에서 너무 늦게 퇴소하는 바람에 오전 졸업식은 진즉 포기하고 가는 내내 딸아이의 훈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지간하면 힘들다는 소리를 별로 하지 않는 아이인데 ‘훈련받는 동안 새침한 아가씨처럼 변덕스러운 날씨에 간식도 없고 하루 종일 땅바닥을 뒹굴며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했다’는 게 딸의 첫 소감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내가 먹다 남긴 과자와 빵 쪼가리를 먹으면서도 '입맛은 없고 단 것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했을 정도다.
매일 새벽 별 보고 일어나서 저녁이 되도록 유격 훈련만 받으니 너무 고되서 밥맛도 떨어지고 평상시에 사용하지 않는 '육두문자'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군기 잡기위한 스파르타식 훈련'이었는데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도 입소하고 4일 정도 지나서는 현타가 몰려오면서 ‘탈단'까지 고민했단다.
그날 밤 당직이신 상관님께 찾아가 ‘그만 두고 싶다’고 했더니 간식을 챙겨주시면서 많이 위로해주셨단다. 더군다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큰오빠와 동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따스하게 위로해 주셔서 잘 극복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손등이며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 건 기본이고 특히나 보급 받은 전투화가 발에 안 맞아서 훈련받고 산행하고 걷는 내내 뒤꿈치가 까져 상처가 아물 새 없이 피가 계속 나서 더 고생했단다.
나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 라며 여전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딸이 힘들어하고 고생하면서도 이 악물고 이겨내는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많이 안쓰러웠다.
긴긴 밤 훈련 기간에 떠오른 느낌이나 각오들을 잊지 않기 위해 벽에 걸린 달력을 뜯어내어 동기들과 서로 나누어 갖고 개발새발 일기를 썼는데 배고프다는 둥, 집에 가고 싶다는 둥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전에 받은 훈련과 비교하면 너무 힘들어서 ‘왜 해병대를 지원했는지, 하루에 한 번 씩 후회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부대 배치는 모든 훈련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오리지널 뺑뺑이’로 진행 되었다고 했다.
딸은 병과가 '포병'이기 때문에 백령도부터 김포 등 아주 먼 곳이 당첨 될 수도 있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큰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포항에 배치되었다. ‘행운의 여신이 항상 함께 한다’고 믿는 딸에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한시름 놨다.
대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군복 위에 졸업 가운과 학사모만 쓰고 간단하게 졸업 인증 사진을 몇 컷 남겼다.
그리고 바로 강당으로 총알 같이 달려 가서 총장을 모시고 개최되는 '22명의 신임장교 임관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각이 서는 제복과 빛나는 배지를 달고 군기가 바짝 든 사관후보생들이 줄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정말 가슴 벅차고 기특해 보였다.
한쪽에는 식순 진행이나 축하 연주를 위한 군악대도 준비되어 있었다. 국민의례 음원부터 애국가까지 생음악으로 직접 연주해 주는 것을 들어보기는 내 생전 처음이다. 방송에서 듣는 행사 음악과 아주 똑같았다. 행사 곡도 다양했고 실력도 좋았다.
딸은 대학 생활과 사관후보생 생활을 열심히 한 덕분에 '총장상'도 받았다. 상장 수여식 등 모든 행사 음악을 군악대가 옆에서 라이브로 축하해 주니 더욱 의미 있고 뜻깊게 느껴졌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고생한 딸을 위해 저녁 식사는 한우로 정했다. 힘들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데 2주 동안 2kg가 빠졌단다. 위도 줄었는지 생각보다 별로 많이 먹지 못했다. 이래저래 참 고생이 많다.
다음 주에는 괴산에서 전국에 있는 학군장교들 임관식 진행 후 바로 입대 예정이라, 내일까지 그동안 잘 살았던 아파트 짐을 모두 빼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손을 모아 남아 있는 옷, 책, 이불 등의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남편이 옆에서 박스도 구해다 주고 정리된 짐들은 따로 구분해줘서 그나마 자정 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큰 짐은 미리 지인에게 나눠줘서 짐이 많이 줄었지만 남아있는 잡동사니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양이었다. 남편 차에 어떻게 다 실을까 걱정하며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짧은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남편은 방 한켠에 쌓아 올려진 짐들을 하나둘 꺼내어 차로 운반했다. 나와 딸은 화장실에 있는 생활용품과 그릇 등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한데 몰아넣고 포장했다.
남편이 한참을 밖에 있다가 들어왔는데 정말 마술을 부린 것처럼 그 많던 짐을 모두 차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풍기며 침대 매트 등 모양이 애매하고 크기가 큰 물건들은 버릴까 말까 몇 번 망설였으나 꼬박 2시간 정도를 넣다 뺐다 마치 퍼즐 맞추듯이 이리 끼고 저리 맞추고 하더니 결국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빈틈까지 모두 쑤셔 넣어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운전석 옆 좌석인 내 자리조차 비좁아서 목포로 내려가는 동안 조금 불편하기는 했으나 그 많은 짐을 별 탈 없이 실어다 준 자동차와, 바짝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잘 해 준 남편이 많이 고마웠다.
우리 가족 단체 톡방에는 애들 셋과 우리 부부 5명이 있다. 전에는 톡을 하면 누구든 확인하는 대로 바로바로 답장을 했지만 이제는 모두 군대에 있어서 누가 먼저 답장을 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딸은 속엣말도 자주 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고 여행도 같이 다녔었는데 2년 동안 딸과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자주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하니 새삼 '남자친구 군대 보내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내가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은 절대 없지만 남자 친구를 떠나보내는 여자 친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아무튼 참 다행이다!
고된 훈련이 끝나고 난 후 눈이 와서 다행이고 그나마 딸이 더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고 마지막까지 훈련 잘 마칠 수 있어서!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을 잘 버티고 임관식도 잘 마치고 새로운 각오로 복무하게 될 딸에게 많이 감사하다.
‘군인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요즘 들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내 딸과 아들들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못 할텐데...’ 하는 염려와 함께 비만 오면 비 맞을까, 감기 들까 걱정이 또 하나 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