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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

김장

by 바람꽃 Dec 02. 2024

우렁각시란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네이버 사전에 표기되어 있다. 

내가 우렁각시라고 말하고자 하는 나의 남편은 물론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그랬듯 가족을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려도 뚝딱뚝딱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다방면으로 든든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우렁각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어머님의 손맛을 닮아 요리를 잘 못하는 마누라 대신 아이들을 위한 밑반찬은 기본이고 아무리 번거롭더라도 식구들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면 유튜브를 다 뒤져서라도 본인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정성을 다하고 특히 가끔 한번씩 들르는 지인이나 친척들에게 대접할 때도 깔끔한 솜씨를 발휘한다.    


26년 동안 함께 사시던 시부모님도 작년에 모두 돌아가셨지만 남편은 어머님이 김장하실 때 시장에 가서 양념 재료를 같이 사고 도와드렸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올해로 두번째 김장을 준비했다. 사실 지난 해에 처음으로 시도했던 김치는 양념이 너무 진해서 남편 마음에 안찼었는지 대부분 다른 사람들 나눠주고 우리는 별로 잘 먹은 기억이 없다. 

 일곱 식구에서 두 분도 떠나시고 애들 셋도 모두 타지에 있어 김치 먹을 사람이라고는 나와 남편 뿐인데도 이거라도 안하면 뭔가 해야할 일을 빼 먹은 것 같고 허전하다며 김치냉장고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통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를 원했다. 


서울에서 식당을 하고 계신 누님이 작년에 보내준 김장이 너무 맛있었다며 은근슬쩍 비싼 고춧가루를 보내주면서 김장 해 주기를 바라시니 어차피 손만 보태는 내 입장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그나마 우리 둘만 먹기 위해 수고를 하는 상황보다는 차라리 낫겠다고 위로했다. 

우리 집안 김장 스타일로 말하자면, '오리지널 전라도식'으로 다양한 젓갈을 많이 섞어 약간 짭짤하게 하는 편인데 이번에 형님이 보내주신 고춧가루가 유독 매워서 올해는 더 맵고 짠 김치가 될 뻔했다. 


남편은 김장 준비를 위해 하루 연가를 내고 아침 일찍부터 시장에 가서 새우젓, 잡젓 등 여러 종류의 젓갈과 알타리무, 쪽파, 과일 등 양념 재료를 사다 놓고 고린내 풀풀 나는 젓갈을 내리기위해 베란다 창문은 모두 열어둔 채로 찬바람 맞아가며 쪼그리고 앉아 정성스럽게 다리고 명태머리만 묶어 판다는 재료를 사다가 육수를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직장에서 반가를 냈으나 이른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퇴근했는데 남편은 여지껏 점심도 못 챙겨먹고 여전히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있어 조금 미안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젓갈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서 한참동안 문을 열어두었다. 남편에게 라면 하나를 재빨리 끓여주고 나 역시 쉴 틈도 없이 바로 김장준비에 투입되었다. 가격이 조금 더 쌌다며 밭에서 방금 캐왔을 것 같은 진흙이 잔뜩 묻은 정리되지 않은 쪽파 3단을 정성스럽게 다듬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가 너무 아파서 바닥에 엎드려서 깠을 정도다. 저녁 무렵이 돼서야 겨우겨우 재료 준비가 끝났는데 저녁 밥도 안 먹고 바로 김장까지 할 기세인 남편을 겨우겨우 말려 미리 준비해 놓은 양념장에 내가 좋아하는 굴을 넣고 배추를 조금 버무려서 맛을 봤다. 

어렸을 적에 품앗이로 김장을 도와주던 친정엄마가 맛 보라며 한입 크게 떼어주던 배추 조각을 먹고 목에 걸려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죽을 뻔한 아련한 기억이 남아있어 최근까지도 김장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왠지 남편이 만든 김치는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원래 김장김치 맛이 이런 맛인가?' 생각하면서도 매운 맛이 너무 강해 머리 속에서 은근히 식은 땀이 날 정도였다. 늦은 시각, 막내 딸도 한 손 거들어 준다며 경산에서 내려와서 다음 날 거사를 위해 투지를 불사르며 마지막 준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조금 일찍 일어난 남편이 절임배추 물을 빼야한다며 혼자 부시럭거리고 있었다. 아침을 대충 먹고 김장준비를 하는데 하룻밤새 양념이 숙성되었는지 다행히 어제보다 매운 맛이 덜했다. 딸도 조금 일찍 일어나 온갖 잔심부름도 하고 안마도 해 주고 여러모로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많이 고마웠다.    


남편의 감독 하에 양념이 조금 짜므로 배추 뿌리쪽에 던지듯이 한번 넣고 쓱 문지르는 식으로 하기로 했다. 그전에는 양념을 앞 뒤로 사이사이 모두 묻혔었는데 그러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더 짤 수가 있으므로 올해는 방법을 바꿔봤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시간도 적게 걸리고 작업시간이 빨리 끝났다. 딸은 물 빠진 배추를 반으로 갈라서 옮겨주거나 가득 찬 통을 정리하고 빈 통을 바꿔주는 등 옆에 지켜서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작업이 더디지 않도록 척척 움직여주고 아빠의 지휘에 맞춰 수육을 삶고 점심을 준비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둔 덕분에 정오무렵 김장을 마치고 잘 끓여진 수육에 뒷통수에 땀이 쫙 올라오면서 정신이 번쩍 깨이는 듯한 매콤짭쪼름한 김치에 밥을 게눈 감추듯 먹고 오늘 작업을 일단락했다.

  

일요일 아침, 인근 마을에 재래시장이 열리는 날이라 고생한 딸을 아침 일찍 배웅하고 장에 들렀다. 

김장의 마무리가 될 쯤에는 대부분 양념이 남으면 배추가 부족하고 배추가 부족하면 양념이 남았던 것 같다. 이번에 김장하는 방법을 바꿔서인지 양념이 많이 남았다. 할수없이 재래시장에 들러 남편이 들기에도 버거운 단단한 배추 3포기와 쪽파 한 단을 더 샀다. 그리고 늦은 저녁에 간해 놓은 배추에 남은 양념으로 남편 혼자 간단하게 마무리를 했다. 


저녁에 큰형님 부부와 둘째형님 부부가 방문했다. 김장김치가 시어머님 손맛처럼 맛있다는 소문이 벌써 광주까지 퍼졌나보다. 할 수없이 수육을 사다가 다시 저녁상을 차렸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수다를 떨다가 오히려 형님들이 남편의 김장 방법을 배웠다. 작년에 절임배추를 사서 그대로 하루를 두었더니 모두 쉬어서 버렸다는 큰형님에게는 배추를 어떻게 관리하고 물은 어떻게 빼야하는지, 작은형님에게는 젓갈과 육수 내는 방법을 전수했다. 다들 매년 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할 때마다 새롭고 부담되고 힘든 작업인 것 같다. 작은 형님네는 젓갈 내리는 솥이 작아서 번거로웠다며 우리 솥까지 빌려가셨다. 다음주 주말엔 형님네 집들도 제법 들썩거리겠다. 


남편이 굳이 김장을 하는 이유는 우리 집안의 또는 우리 세대까지만이라도 김장의 전통을 계속 살리고 싶다는 의지였다. 또한 김장을 하고나면 올해를 잘 마무리 하고 다음 한 해를 든든하게 준비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갈수록 우리의 문화도 사회 분위기도 더욱 단순해지고 번거로움을 피해가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우렁각시 남편 덕분에 가장 머리아픈 김장도 금방 끝이 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내년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해 마다 김장철이 되면 하게 되는 결심이지만 내년에 누님이 비싼 고춧가루를 또 공짜로 보내준다고 유혹한다면 ‘싫어 잉~~, 잘 먹지도 않는데 하지말자!’며 남편에게 여전히 말로만 계속 반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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