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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눈사람

by 바람꽃

남편 얼굴에 빨갛게 뾰루지 같은 수포가 생겼는데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주말마다 콧바람 쐬러 간다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나도 피로 유발과 면역력 저하에 한 몫 한 것 같아 오랜만에 남편 친구도 만나고 몸보신도 할 겸 담양으로 향했다.

최근에 눈이 많이 내려서 산중에 위치한 식당 주변은 도시의 거리와는 다르게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한국의 겨울 산수화에 자연스럽게 담긴 것 마냥 너무나 환하고 아름다운 겨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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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눈이 조금 쌓이는가 싶으면 유치원생을 포함하여 아이들이 하루종일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덩이를 굴리느라 '언제 눈이 왔나?' 의심될 만큼 금새 자취를 감췄다.

며칠 전 캠핑장에서도 밤새 쌓인 첫눈을 모아 삼삼오오 힘을 합쳐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뇌리에 남아 있었는데 하얀 바닥에서 얽히고설키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릴 때 눈장난 했던 추억들이 하나둘 오버랩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 나이에 무슨 눈사람이야~ 그냥 가만히 앉아 구경이나 하지’라고 생각했을텐데 언젠가부터 문득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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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남편이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계산하러 갔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눈송이들이 나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장갑만이라도 있어야지' 싶어 카운터에 물어보고 '없으면 관두자' 했는데 어라? 눈사람 만든다고 했더니 "이거라도 괜찮으시다면 쓰세요~" 라며 또 기꺼이 장갑을 찾아서 내어준다. 그것도 여름에 사용할 만한 얇디 얇은 미끄럼 방지용 엠보싱 장갑!


분위기가 왠지 '일단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베어야 할 것 같은 상황' 인지라 할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뭉쳤다. 그런데 웬걸? 아이들이 쉽게 쉽게 눈을 굴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그냥 '눈덩이 하나 만들어서 대충 굴리면 끝?!' 이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생각보다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았다. 조금 뭉쳐지는가 싶으면 금방 떨어져 나가고 포슬포슬 흩어져 버렸다. 아이를 셋이나 키웠지만 눈사람 만든 지가 언젠지 기억도 까마득했다. '이것도 기술이 필요했나?' 상기하며 데구르르 눈덩이 굴리듯 잔머리를 함께 굴렸다.


어디서 귀동냥한 건데,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 때는 습기가 많아서 응집력이 강하고 밀도가 높은 습설이 잘 뭉쳐진다'고 했다. 반대로 똑같은 눈이어도 '건설은 일단 가볍고, 쉽게 흩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눈사람 만들기 힘들다는!'

반짝반짝 빛나며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녀석들은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한없이 자유로운 눈꽃이라는 거~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 이렇게 물러설 수 없지’ 싶어 진흙으로 토기를 빚는 것처럼 눈가루를 얼려가며 정성스럽게 조금씩 뭉치고, 살을 붙이고, 이어서 굴리는 과정까지 계속 밀어붙였다. 눈덩이가 커질수록 무게도 무거워져서 제법 힘에 붙였으나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혼자 씩씩거리면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 모아 몸뚱이를 먼저 완성했다.

잠시 쉬면서 인증 샷 한 컷 남기고 다시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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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머리 부분은 한번 해 본 요령도 있고 더 작은 동그라미를 만드는 작업이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남편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서양 눈사람은 몇 등신이게?’

‘잉? 당연히 2등신 아니여? 머리와 몸통!’

'정답은~~~ 서양 눈사람은 3등신!' 이었다.

‘겨울왕국’의 울라프도 그렇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머리, 가슴, 몸통?’ 으로 정말 3등신이 맞는 것 같다.

눈사람 조차도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느껴지다니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사실을 또 하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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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paperaccess.com 이미지 - 울라프 -


나이 50이 넘어서 나의 등 뒤로 쏟아지는 손님들의 웃음 짓는 눈길을 무시하고 혼자 눈사람을 만들려고 하니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호흡도 가쁘고 허리가 끊어질 듯 많이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난 서양인이 아니므로 동그라미 딱 2개만 만들거임!" 스스로 만족했다는 거~^^*


얼큰하게 취한 남편이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예쁜 동그라미까지는 못하더라도 눈사람 형태는 대충 갖춘 것 같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동그라미가 울퉁불퉁 고르지 못하고 뒷부분은 조금 찌그러지기도 했다. 눈사람의 끝판은 목도리나 모자인데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아쉬운대로 사진으로 마무리 했다.

'나 혼자 이렇게 정성들여 눈사람을 만든 기억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을 되새겨보는 동안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나의 동심을 다시 만난것 같아 반가웠고 조금은 뿌듯하고 많이 즐거웠다.

비록 많이 못생겼지만 지나가는 손님들도 나의 수고와 땀의 결실을 보면서 눈사람 만들던 추억도 회상하고 작은 미소 하나 입가에 머무른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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