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있기에 결과도 있다
1870년, 9살 유기연은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어 지옥 같은 조선 말기를 온몸으로 겪는 중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미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었고 유기연 같은 고아를 돌봐줄 처지가 되는 국가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9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 노릇이나 하면서 최악의 유년기, 그리고 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똑똑했던 소년 유기연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당시 산업 혁명을 통해 이미 서구에서는 익숙했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에서는 낯설었던 재봉틀을 통한 옷감 제조 사업을 일으키며 20대에 한반도의 초기 자본가 계열에 들게 된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유기연의 인생사는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스러져간 사업과 더불어 한 인물을 남기며 완성된다. 1895년 유기연이 20대 중반일 때 그의 아내 충주 김씨 김확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1904년 아버지와 같은 9살에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를 두고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천애 고아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게 된, 유일형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유일형은 미국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미국인이 부르기 편했고, 스스로 고국을 기억하기 좋았던 유일한(柳一韓)으로 바꾼다. 오늘날 '재벌의 길을 포기한 기업가'로 불리는 유한양행의 창업주, 바로 그 유일한 박사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에 있어 우선으로 두는 가치가 있다. 돈, 명예, 권력, 또는 개인과 가족의 미래와 같은 가치들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훌륭한가'를 따지기 전에 각자에게 중요한 것들임을 먼저 존중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 중국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에도 활발히 사업을 영위중인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한 유일한은 이미 당대 미주 한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축에 드는 사업가였다. 그런 그에게 '민족' 따위를 들먹이며 희생을 강요하는 말이 통했을 리가 없다. 아니 통할 리가 없다고 누구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국에서 유한양행을 창업한, 조국과 민족에 가장 부족한 의료, 교육을 위해 투신하는 청년 유일한에게는 돈, 명예, 미래 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가 한창이던 1926년 귀국한 유일한은 경성부 종로2정목(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미국에서 이미 잘나가던 '라초이'의 지분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짐은 짐꾼들 조차 놀랐을 만큼 이상했다. 그 짐꾼들에게는 태어나서 처음보는 의약품으로 가득한 보따리들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는 고국에 가장 필요한 의약품을 가득 싣고 돈, 명예, 미래 따위는 모두 이역만리에 내버려둔 채 아버지의 9살, 스스로의 9살을 천애고아로 만든 지옥으로 돌아온 것이다.
30대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온 청년 유일한의 삶을 별로 평탄하지 못했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고, 해방 이후로는 전쟁과 독재 정권 치하에서 여전한 지옥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모범 납세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최고의 사업가로 모든 시간을 버텨냈다. 마지막에는 재벌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에 모든 재산을 환원하면서 까지 말이다. 그가 겪은 천애고아의 설움과 인종차별, 나라 잃은 백성의 고통은 마치 고난이 아닌 적절한 자극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일한은 정말 완벽한 삶을 살아 내었다.
별로 유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물러날 곳이 없던 청년기,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나는 유일한 박사만큼의 훌륭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와 닮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처럼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같은 타이틀을 가지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돈, 명예, 미래를 얻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 삶에 있어 단 한번도 목표가 되어주지 못했다.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편한 길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편견이 꼭 틀리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리프팅'이라는 한 분야에 대해 완전히 집중하고, 그 수술 분야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이어나가려는 내 진심이 그런 편견에 매몰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는 진심으로, 정말 내 생의 오늘을 그대로 바쳐서 '리프팅'이라는 한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강남의 성형외과 원장으로서 돈 될만한 다른 분야들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 최소한 '리프팅'을 보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만 집중하는 이유가 그런 나의 진심 때문이다.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가 되기 위해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려 여전히 매일 노력한다. 리팅성형외과 서울점, 그러니까 강남 한 가운데에서 우리 병원과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기대하는 '친절함', 그것을 충족 시켜줄만한 '실력'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수준임이 분명하다.
이만큼의 '친철함'을 갖춘 나와 우리 의료진이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한다면 강남의 미용 성형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파이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를 포함한 리팅성형외과의 모든 의료진, 스탭들에게는 돈보다 더 큰 목표가 있다.
지금 돈을 더 벌고, 더 큰 명예를 얻어 과시하고, 좀 으스대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는 것보다 내가 매일 만나는 환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지금 내 삶의 목표이다. 물러날 곳이 없던 어제의 나를 세상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나는 적어도 '리프팅' 한 분야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도움을 주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