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울창한 숲 대신 내 마음의 '적정 밀도' 찾기
우리의 하루는 매일 아침 딱 일정한 양의 에너지만 가지고 시작된다. 펑펑 써도 오래가는 에너자이저가 아니라, 휴식과 충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꽃도 햇빛을 받아 활짝 피었다가 밤이되면 잎을 오므리듯이. 그런데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방전되어 버린다면, 정원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는 증거다.
며칠전 아침이 그랬다. 이때다 싶은 듯 울려대는 광고 메세지 알람을 시작으로, 책상에 앉기도 전에 휴대폰은 일제히 울려댔다. 그러다 일반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반갑게 받았더니, 역시나 건강보험 실태조사를 빙자한 광고였다. 아침부터 내 인내심의 배터리는 이미 빨간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밥은 먹었니? 오늘 어디 나가니?” 용건 없는 다정한 안부가 들려왔지만, 방전된 내게는 그 따뜻함을 받아낼 여력이 없었다. “응, 왜. 나 바빠, 끊어” 결국 쏘아붙이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두운 방 안,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지독한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엄마가 잘못한 건 없는데. 내 정신을 산란하게하는 알람의 홍수들 사이, SNS 속 타인의 정원을 훔쳐보며 느끼는 자격지심에 내 정원의 양분이 다 새나갔을 뿐이다. 정작 소중한 사람을 위한 한 줌의 양분조차 남겨두지 못한 정원사의 명백한 과실이었다.
휴대폰의 모든 알람을 켜두는 나와 달리, 짝꿍은 대부분의 알람을 꺼두고 벨소리마저 무음으로 해두곤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중요한 소식을 놓치면 어쩌나 염려됐고, 숨기는 비밀이라도 있나 싶어 소리를 켜두는 게 좋지 않겠냐고 참견도 했다. 그런데 참 민망하게도, 지금의 나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중이다. 알람의 압박 속에서 내 리듬을 잃고 바싹 말라간 뒤에야 깨달았다. 결국 짝꿍에게 시인했다. 자기만의 리듬을 지킬 줄 알았던 건 너였다고. 모든 정보에 나를 노출하며 정원의 밀도를 높이는 것만이 정답인 줄 알았던 나의 오답이었다.
에너지가 새어나가는 구멍을 알아야 비로소 메울 수 있듯, 내 정원의 ‘적정 밀도’를 알아야 괜한 스트레스에 메말라가는 걸 피할 수 있다. 내 짝꿍은 나무 몇 그루와 바위 하나만 있는 고요한 정원에서 평온을 얻는 미니멀리스트로 최소한의 정보만을 취한다. 반면 나는 온갖 꽃과 나무를 일단 심고 보는 맥시멀리스트였다. 문제는 내 기질도 모른 채 남들이 좋다는 울창한 숲만 부러워하며 무작정 나무를 심어댈 때 생긴다. 감당 못 할 무성함은 반드시 정원을 병들게 한다.
정원사의 눈으로 땅을 읽는다는 것은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땅이 쩍쩍 갈라져 있거나 쓰레기로 가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땅의 상태를 정확히 마주하는 순간부터 정원은 이미 변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땅을 제대로 마주하고나면 무작정 남의 꽃을 사다 심는 대신, 내 흙을 고르고, 흙에 맞는 씨앗을 고민하기 시작할테니까. 호미를 내려놓고 발밑을 살피는 이 시간이, 어쩌면 물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