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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Sep 02. 2024

K2: 추악한 사랑

그를 기다리는 것은 늘 어렵고 힘든 일이다. 1분……. 2분…….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다. 아무렇게나 틀어 놓은 종교 라디오 방송에서 느리게 흘러 나오는 찬송가의 박자와는 반대로 내 심장의 템포는 점점 더 빠르게 뛰고 있다. 쿵쾅, 쿵쾅, 쿵쾅. 그와의 약속 시간이 벌써 45분이나 지났다.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오늘도 약속을 못 지키는구나.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열어놓은 창문 커튼 틈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녁 8시 45분. 8시까지만 해도 어둡진 않았는데 벌써 세상이 어두워져 있다. 나도 불을 켜지 않은 암흑 같은 거실 속에 혼자다. 혼자는 언제나 외롭다. 그는 나를 또 비참하게 혼자 남겨 두었다.


내가 그와의 관계를 유일하게 털어놓은 인물인 윤지는 나에게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은서야, 너 그거 진짜 사랑 아니야. 그래, 사랑이라고 쳐도 짝사랑이야. 어쩌려고 그래……. 상처 받는 건 너야.”

윤지야, 짝사랑은 아니야,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꾹 삼켰다. 그와 난 서로 사랑한다고 매일 같이 속삭이고, 서로의 출퇴근 시간을 은밀히 기다리고, 이미 몸도 섞었는걸.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분명히. 그런데 그는 또 오지 않았다. 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겠지’하고 그를 옹호한다. 버려지고 버려져도 주인을 찾아가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다. 그렇지만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 전부를, 이 세상을 모두 주고 싶을 만큼 헌신적인 마음을 갖는 것.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마음은 매번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난 그가 보고 싶어서 울고, 약속을 안 지켜서 미운데도 너무나 사랑해서 운다.


처음부터 그를 이렇게나 사랑한 건 아니었다. 내가 그와 처음 마주한 건 입사 후 첫 회식 자리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10년쯤 선배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술을 좋아했고 적당히 취했다. 그는 인천 가는 지하철 1호선을 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물었다.

“은서야, 넌 집이 어디야?”

그와 나는 공교롭게도 지하철 두 정거장 차이였다.

“같은 방향이네.”

그가 신기하다면서 남자 후배 대하듯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뭐지, 싶었다. 서울 길에 서툴렀던 나는 어색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저녁 10시쯤 된 시간이었는데도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여기저기서 얼큰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다들 회식을 한 모양이구나…….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지하철이 덜컹.

“무슨 생각해? 너 넘어진다.”

중심을 잃은 팽이마냥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던 찰나,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바로 세웠다. 그때 그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봤던 것 같다. 동양인치고는 약간 밝은 갈색의 눈동자. 속쌍꺼풀이 예쁘네……. 나도 모르게 생각하다가, 유부남을 대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스로를 힐난하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날 이후 우리는 공교롭게 마주치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노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늘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내 출근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북적이는 지하철 속에서 사람 적은 곳을 헤매다가 마주쳤다. 그러다가 점점 일부러 출근 시간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난 그와 함께 하는 출근길이 즐거웠다. 대화가 막힘 없이 잘 통했으니까. 내가 늦잠을 자서 출근시간에 못 맞춰 같이 가지 못하게 됐을 땐 조금 아쉬웠다. 그러다 언젠가는 그와 같이 못 가서 크게 상심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출퇴근길엔 항상 함께였고, 점심을 먹을 땐 다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척했지만 그와 나만의 눈맞춤이 잦아졌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어쩌다 마주쳐 손등을 스친 게 다인데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그도 같은 감정이었을까.


누가 먼저 마음을 표현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에 취한 어느 밤이었던 것만 기억 난다. 회식 후 그는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자신이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내가 내리는 역에 내렸다. 그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본인도 많이 취해서 얼굴이 벌게졌는데. 둘 다 술에 절어 아무 말이나 해대면서 걷다가 우리집 앞에 도착했다. 그가 올라가려는 엘리베이터를 멈추고 나에게 뭐라고 했고, 나도 내려서 뭐라고 했다. 그리고 서로 뭐라고 뭐라고 하다가 얼굴을 마주하게 됐고 입을 맞추게 됐다. 이게 내 기억의 끝이다. 다음 날 그에게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난 어제 일 실수라고 생각 안 한다.’

당시 필름이 끊겼었던 나는, 간신히 전날 그와 있었던 썸띵을 기억해냈다. 두근거려선 안 되는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고, 동시에 나의 도덕성과 윤리의식, 사리분별 능력 등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는 나를 책임지겠다는 말일까. 우리가 그런 대화까지 나눴던가?


그런 생각들과는 상관 없이 우리의 행동은 점점 과감해져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점심시간에 근처 모텔의 대실을 이용했다. 비상구도 우리 사랑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양심은 닳고 닳아 동그라미 모양이 되었고, 더 이상 찔리는 것도 없게 됐다. 나는 그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선배, 사랑해요, 하고 신음했다. 그는 항상 나도……, 라고 답했다. 어떤 때는 뒷말을 듣지 못해 괜스레 슬펐다. 나는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함께 해주길 원했다. 그는 내가 그런 내색을 할 때 인심쓰듯 나와 약속을 해줬다. 몇 시까지 나를 보러 우리집에 오겠다는 약속. 하지만 매번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나는 늘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기다릴 때면 현관 밖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휴대전화 진동이 울릴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그일 줄 알았는데 그가 아닐 때면, 그가 아닌 사람에게 괜히 화가 난다.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선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매번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그 언젠가 도착하기 전에 난 낙엽처럼 빼짝 말라 바스라질 것이다.


‘5-1로 와.’

오전 8시쯤 오는 그의 문자 메시지는 항상 간단 명료했다. 빠른 환승이 가능한 플랫폼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그는 어제 누군가에게 망치로 머리를 맞아 기억을 잃기라도 한 듯 약속에 대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투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아침에 와이프가 애 소풍 때문에 김밥을 싸놔서, 그걸 먹고 왔어. 오랜만에 아침 먹었네. 아,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에서 햇빛에 비춰 반짝이는 결혼 반지가 보였다. 심장이 덜컹였고, 짜증이 났다. 당연하지, 와이프고 가족인데…….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러나 몇 번을 되뇌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화가 났다. 나와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닌가. 까먹은 걸까.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 까먹었을 리가 없을 텐데.


‘점심에 비상구에서 봐요.’ 메세지를 보냈다. 그는 ‘ㅇㅇ’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도 못할 것이다. 하루종일 약속에 대한 언급조차 안 했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그리고 그저 아침에 김밥 하나 먹었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려와서 지금까지도 기분이 잡쳐 있다는 걸 백 번 설명해도 이해 못하겠지.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점심시간이 되었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고, 사무실에 그와 나 둘이 남았다. 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10분 정도 뒤에 올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그가 왔다. 자신의 등장에도 아무 말 없는 나를 보고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당황하며 내 눈치만 보는 그 대신 내가 입을 열었다.

“선배,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무슨 할 말?”

진짜 그는 모르고 있구나. 나와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는 거였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올라오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 눈에 속눈썹이 들어간 척했다.

“어제 약속……. 온다면서요.”

“아……. 그거 사정이 있었어. 와이프가 약속 간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안 간다고 해서. 겨를이 없어서 연락도 못했다. 미안.”


그에게는 늘 사정이 있었고, 이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나는 그 사정을 아무렇지 않게 봐줘야만 했다. 그에게는 기혼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므로. 내가 약속을 연락도 없이 파투낸 것에 대해 따져 물으면, 그는 늘 “미안”이라는 말로 끝맺음했다. 나는 그가 미안하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이미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해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김밥은요.”

김밥 먹다 목 메인 사람처럼 글자 하나하나 꾹꾹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예상대로 어리둥절해 했다.

“무슨 김밥?”

“선배가, 오늘, 아침에, 먹었, 다던 그 김밥…….”

그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게 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져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말을 하기는 무리였다. 급기야 콧물까지 슬그머니 나오기 시작했다.


“은서야? 김밥이 왜. 내가 와이프 얘기해서 그래?”

그는 자신의 딸 다루듯 조심스레 내 볼을 잡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생각보다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가 미웠다. 열두 살이나 어린 나와 수많은 섹스를 했으면서, 왜 이럴 땐 애 보듯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자동으로 무장해제가 되어 버렸다. 또 다시 버려졌다가 주인 찾은 강아지가 된 것이다.


우린 수많은 문자 메시지를 남기고 사랑을 속삭였다. 톨스토이는 말했다. 나는 사랑으로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한다고. 난 그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오는 나쁜 짓임을 알면서도 사랑을 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불륜 이야기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닿지 못할 사랑은 슬프고 애처롭구나. 나는 나를 급기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 기뻤다가, 만나지 못할 땐 슬펐다가, 연락조차 닿지 않을 때면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하루하루 기분이 왔다갔다 롤러코스터를 탔다. 누가 이 롤러코스터 좀 멈춰줬으면 하고 바랐다. 토할 것 같아.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였다. 결국 난 또 그가 내게 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고해성사하듯 말한 적이 있다.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친구들은 당연히 놀랐다. 그리고 이 사랑을 이어가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그가 아니라 상간녀라는 타이틀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일곱 살 먹은 딸까지 있다는 사실까지는 차마 밝힐 수 없었다.

“우리 나이 충분히 어리고 예쁘다. 다 늙은 남자를 뭐가 좋아서 만나려고 하는 거야?”

친구들은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긴 무리였다.


나는 그의 스마트함이 좋았다. 그는 내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냈다. 선배, 저번 버전보다는 이번 게 낫죠? 선배, 완성한 기획서 업데이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배, 선배는 왜 이렇게 잘 아세요? 선배는 왜 이렇게 멋있어요? 라고 매일 질문하고 백 번쯤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출퇴근을 같이 해도, 점심시간 혹은 퇴근 후 잠깐 모텔에서, 비상구에서, 우리집 옥상에서 서로의 달아오른 몸을 매만지며 사랑을 나누어도, 그와 나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그는 나와 진지한 이야기를 특별히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굉장히 사사로운 것들이었다. 어제는 술을 얼마나 마셨고, 드라마 내용이 어땠고 하는······. 한때는 그와 내가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이 정도 사이밖에 안 되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곧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의 껍데기라도 가질 수 있으면 가지고 싶게 되었다. 그가 약속한 시간에 내게 와주기만 한다면,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나의 사랑은 완성되는 거였다. 지금 이 순간만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미래따윈 상관 없다고,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책임질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갑작스레 이직을 준비하게 되면서다.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내 삶은 내다버린 듯이 살던 나를 걱정하던 윤지가 회사를 옮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겨우 남자 하나 때문에 이직을 하려는 것이었기에 어느 곳이든 좋았다. 발이 넓은 윤지 덕분에 나는 일사천리로 앞으로의 거취를 정할 수 있었다.


-너 그만 둬?

팀장에게 개인사정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며 사직서를 내밀고 내 자리로 왔는데, 그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업무적인 메시지만 주고 받았기에 이렇게 사적인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는 게 반가웠다. 그는 일할 때도 나를 유심히 살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사소한 사실 하나가 기쁨으로 다가왔다.

- 네. 괜찮은 자리가 있길래요.

좋은 기회가 생겨서요, 괜찮은 기회가 생겨서요, OO 회사로요, 몇 번 지웠다 썼다를 반복했다가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의 쪽을 보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나와 떨어지는 게 싫은 거구나,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이렇게라도 그의 관심을 받게 되니 좋았다. 그가 나를 붙잡을 것 같았다. 약속을 자꾸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나 때문에 떠나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네가 필요하다고, 등등의 나를 갈구하는 말들이 듣고 싶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에게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사랑이 아예 없었던 일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나를 평범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업무적인 이야기만 하고 만남을 최소화했다. 멀어져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직감이라도 한 듯 그는 나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일부러 우리가 출퇴근을 같이 하던 시간을 피해 먼저 출근하고 퇴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가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지니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랐던 나는 점점 피폐해졌다. 일단 식욕이 사라져서 4kg이나 빠졌다. 한 달 후 다른 회사에 출근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가 나에게서 떠나가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마음이 아픈 게 몸으로 옮겨가기라도 한 듯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도 얼굴도 붓고 뜨겁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열병이 난 것 같았다. 회사에 급하게 병가를 내고 하루종일 엄마의 간호를 받아야만 했다. 내심 그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렸지만 하루종일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역시나 연락이 없구나. 내가 병가를 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통해서 들었을 텐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안부조차 묻지 않는구나. 그가 눈물 나올 만큼 원망스러웠다.


그와의 관계는 조각조각 분해된 퍼즐이 된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잘 맞춰 왔는데 영문도 모른 채 와르르 분해된 것이다. 퇴사일과 함께 그와 진짜 이별하게 될 날도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점심을 함께 먹고 싶어 메시지를 보냈다.

- 선배, 이따 점심 같이 드실래요?

- 둘이서?

- 싫으세요?

- 아니 ㅋㅋ 알겠음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으로 갔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점심을 거르겠다고 하고 몰래 다니던 허름한 식당. 그는 늘 고등어 구이, 나는 순두부찌개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식당에서 틀어놓은 뉴스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음식이 나왔고 그에게 수저를 건넸다. 그는 젓가락으로 고등어 가시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점심 둘이 먹는 거 오랜만이다.”

국자로 앞접시에 순두부찌개를 덜어내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선배가 저 피했잖아요.”

씁쓸함이 섞일 수밖에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대놓고 피하는 그 기분을 그는 알긴 알까? 하루에 얼마나 심장이 덜컹거리는지, 내려 앉는지도.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상처 받는 쪽은 늘 나였으니까.


그는 티슈를 뽑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당황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일부러 피한 거 아니야. 어쩌다 보니…….”

거짓말쟁이. 선배는 양심의 모양이 어떤가요? 묻고 싶었다. 나는 동그라미가 됐어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동안 닳고 닳아 없어졌어요. 선배에 대한 사랑만 남았어요. 입 밖으로 내고 싶은 소리를 꾹 참았다. 대신 물음표 살인마처럼 물어댔다.

“선배, 내가 선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 알아요, 몰라요?”


그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았다. 그에게 내 마음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나보다 12년 더 산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너무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선배한테 나와의 약속이 어떤 의미일지 모르겠어요. 근데 나한텐 선배 약속이 달력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별표 쳐놓고, 매분 매초 시계나 쳐다보면서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가나’ 할 정도로 설레고 소중한 거예요. 집을 몇 번이나 닦고 또 닦고, 속옷을 몇 번이나 고르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놨다, 선배 연락이 언제 올까 그것만 기다려요.”


내 입에서 ‘속옷’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고등어 눈알을 발라내고 있던 그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서 왜 그런 얘기를 꺼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도 스스로가 웃기긴 했다. 고등어나 바르고 있던 사람에게 사랑 고백이라니. 하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재채기처럼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기관지를 거쳐 혀를 지나 입을 통해 내뱉어졌다.

“선배한테 책임질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알아요. 온전히 나만 가질 수 없다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일부러 피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약속 못 지킬 거면 하지 마요. 그거 때문에 나는 하루종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에요. 선배 기다리면서 현관 밖으로 귀 기울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리는 소리라도 들리면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속으로 선배다! 하고 쾌재를 부르는데, 다른 사람일 때면……, 그땐, 그땐 당장 뛰쳐 나가서 멱살 잡고 왜 지금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냐고 마구 소리치고 싶어요. 정말이지 미쳐버릴 거 같아요.”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마음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는 눈알이 없는 생선 대가리만 바라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순두부찌개를 한술도 못 뜨고 있었다. 나는 항상 ‘선배를 향한 내 마음이 이 정도로 크다!’ 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마음이 심장이라면, 심장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5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 괜히 네 마음 힘들게 한 것 같아.”

오랫동안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어 한 말이 고작 이거였다. 미안하다. 그 말은 나에게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아와 날카롭게 꽂혔다. 우린 사귄 것도 아닌데 차인 기분이었다. 웃겼다. 웃긴데 금세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대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요? 그게 다예요?”

그는 고개를 떨궜다.

“응. 내가 괜히 시작을 한 것 같아. 너는 앞길이 창창한데.”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그의 얼굴이 단호해보였다. 멈출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온 몸 구석구석이 멍든 것 같다. 그가 우리의 시작을 후회할 줄은 몰랐다. 분명 같이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이 나에게 피해를 준마냥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 끝을 맺으려 하고 있다.

“이기적이네요, 선배. 내 마음은요? 선배 혼자 시작한 거 아니고, 우리 같이 시작한 거잖아요. 근데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미안하다. 난 네 마음이 이렇게 클 줄 몰랐어. 진짜 미안.”

또 미안하다는 말.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건지, 사랑한다고 했던 건 뭐였는지, 또 그동안 우리가 했던 약속은……. 그렇게 혼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미안하다고 해버리면 끝인 일인지. 계속 미안하다고만 하는 그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선배, 저 갈게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는 것 같아요.”

눈물을 미처 다 닦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다르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 볼 수 없다…….


눈물을 황급히 수습하느라 그의 표정을 못 봤다. 내가 이렇게 가 버려도 나오지 않겠지. 내가 아는 그는 맺고 끊음이 정확한 사람이다. 그의 생각을 모두 다 알 순 없지만, 이제 우리 사이는 끝난 것이다. 내 생각에 그는 내 감정이 선을 넘어버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애정결핍 걸린 애마냥 사랑을 갈구하는 게 귀찮았겠지. 대충 몇 시에 우리집에 오겠다는 약속이나 해주고 끝내려 했는데 왜 안 왔냐고 캐물으니까 싫증이 났겠지.


뒤돌아 보니 역시나 그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상가 계단에 주저 앉았다.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로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을 알았다면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도, 그가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은 집착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게 다 잘못됐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시간대였다.


“은서야.”

그의 목소리였다. 환청인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진짜 그였다. 그는 주춤거리며 내 앞에 서있었다. 그를 보니 방금 식당에서 나눴던 대화가 없었던 일로 느껴질 정도로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나왔어요?”

그가 나와서 좋으면서 괜히 퉁명스레 툭 내뱉었다.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나를 안았다. 조금만 느슨하게 안아도 그를 놓쳐버릴 것 같아서 더욱 꽉 안았다.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점점 괜찮아질 거야.”

“안 괜찮아지면요?”


진짜 마지막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서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붙잡고 싶었다. 애 같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어쨌든 애였다.

“장담할게. 진짜 괜찮아져. 너 한 달 후면 다른 남자친구 생겨서 헤헤 거리고 있을걸.”

그가 장담하는 게 싫었다. 스물 다섯 먹도록 세 번의 연애를 했지만, 이 정도로 절절하게 사랑한 사람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한 달이 아니라 계절이 네 번쯤 바뀌어도 그를 잃을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데, 내 마음에 대해 대체 어떻게 장담하는 건지. 순간 그의 눈동자에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호하고 늠름한 사자 같았는데 지금은 갈퀴가 축 늘어진 사자 같았다. 그의 눈빛은 나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배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마지막 발악. 그러나 그의 슬픈 눈동자는 마지막을 말하고 있었다. 이제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이므로, 우리는 진짜 헤어져야 했다. 그가 먼저 나에게서 몸을 뗐다.

“나 먼저 들어간다. 나 가고 2분 뒤에 출발하도록 해.”

그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제 나는 진짜 홀로 남겨졌다. 우리는 며칠 후부터 아예 볼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왔다. 엄청난 폭풍우를 겪은 후 폐허만 남은 것 같았다. 폐허는 언제쯤 원상복구 될 수 있나. 나는 언제쯤 그를 잊을 수 있나. 그가 말한 대로 2분 뒤 상가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과거 추억을 먹고 살겠지.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햇볕이 따가웠다. 그냥 스물 여섯에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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