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심통 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어. 그럴만해. 나는 오빠만 바라보고 오빠 말에만 대꾸하거든. 그렇다고 언니가 날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니야. 그저 반응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람들은 이걸 개. 무. 시.라고 하더라. 점점 '개'가 앞에 붙는 단어가 많아졌어. 우리 개들이 인간 세상에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게 확실해.
언니는 어제부터 침대에 누워서 앓는 소리를 냈어. 배가 아플 때 부드럽고 따뜻한 내 몸은 특효약이지. 엄마도 속이 차다면서 나를 가끔 배 위에 올려두곤 해. 엄마 배 위에 앉으면 파도를 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 그렇지만 언닌? 귀찮을 뿐이야. 저렇게 누워 있다가 "뚱자야 일루 와봐." 하고 부르지만 나는 꿋꿋이 모르는 척 하지. 그러면 나를 들어 올려서 억지로 자기 옆에 있게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 걸까? 견생 9년 이런 인간은 처음 봐. 엄마랑 오빠는 나를 귀찮게 하는 적이 없었거든.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으니 언니가 오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빠가 침대에 누우면 내 몸이 자동 반사적으로 점프를 해서 침대에 올라간다는 것을 아나 봐.오빠 옆자리는 원래 내 자리니까!
그들이지므르
언니는 전에 개한테 물렸던 적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만지는 것조차 어려워했지. 언니가 지금 내 나이였을 때, 이웃집 재롱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기억력이 안 좋은 언니는 깜빡 잊고 재롱이가 새끼들을 품고 있던 방문을 열었어. 잔뜩 예민해져 있던 재롱이는 달려 나와서 언니의 허벅지를 물었지..! 쿠왕!!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는 귀찮게 해선 안 돼. 아무리 순한 개라도 그때만큼은 절대순하지 않거든. 인간도 마찬가지 아냐? 자기가 낳은 새끼를 필사적으로 지키잖아. 그런데 왜 개들이 새끼를 낳자마자 서로를 떼어놓는 거야? 인간들은 때로 너무 잔인해.
내가 왜 언니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던 얘기는 마저 할게. 재롱이에게 물린 뒤로 언니는 큰 개만 보면 무서웠대. 걷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자기한테 달려들 것 같았대나. 그래서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기사가 나면 정황도 살펴보지 않고 '저런 개는 안락사를 시켜야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해. 길가에 한쪽 발을 들고 오줌을 싸는 수컷을 보면 그 자리가 노랗게 변하는 것에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대. 하지만 나를 만난 이후부터 입마개를 한 개들이 숨은 제대로 쉴까 안쓰럽고 오줌으로 노랗게 변한 길도 금세 원래 색깔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야.인간들은 자기가 경험한 세계 이상을 보려고 하지 않아. 그치만 한 번 내게 빠지면 많은 것에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될 거야.
오빠 옆이 제일 좋은 나 vs 배가 아파서 나를 이용하는 언니
"뚱자~"
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는 한껏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고 하지만 어라? 지금은 손에 식빵이 들려 있네. 이럴 때는 바로 고개를 돌려서 눈을 댕그랗게 뜨고 반응을 해 야지. 주말 동안 언니는 내 간식 책임자니까 말 잘 듣는 척을 해야돼. 언니가 사과를 깎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궁둥이를 착 내리고 언니만 보는 척을. 한 가지 인정하자면 이 언니는 내게 새로운 간식 세계를 열어줬어. 리코타 치즈라는 신세계.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 그런데 주말에 오빠 집에 가면 항상 이 리코타 치즈가 있어.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고생했다며 황태 소시지를 주고, 침대에서 숨을 헐떡이면 물을 대령해.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먹기 전에 조금씩 떼어놓고 먹는 모습이 개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눈을 뜨자마자 나를 데리고 똥을 누이러 나가는 건 칭찬할 만하지. 날이 춥다면서 딸기 담요까지 갖고 나가는 건 좀 오버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콧물을 흘리는 꼴을 보이고 말았지만.
애착 담요와 아침 루틴
갑자기 언니가 어떤 물체를 들고 노래를 시작해. 잠이 솔솔 오네. 잠이 오는 노래를 잘 부르는 것만큼은 인정해야겠어. 오빠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목을 주물락거리다가 몸을 올렸다가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고 나는 언제나처럼 오빠를 향해 있지. 보고 있자니 조금 지루한 것도 같아.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서 고개를 돌리니 나를 보고 있던 시선.....! 악!!!!!
언니랑 또 눈이 마주쳤어. 이 언니랑은 눈을 마주치면 안 돼. 그럼 실실 웃으면서 입술을 쭈욱 내밀 거라고. 뽀뽀는 또 왜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눈앞에 내려온 털을 옆으로 넘겨주고는 또 뽀뽀를! 아무튼 날 귀찮게 하는 행동에는 변함이 없어. 그래봤자 강아지에게 주인은 단 한 명이라고.아무리 나를 꼬셔도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나는 언제까지고 오빠 목소리에만 반응을 하고 오빠만 바라볼 거니까.
그런데 왠지 말이야.. 누군가를 바라만 보던 나의 뒤통수를 보는 인간이 한 명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