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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기다림 Jun 22. 2024

당나귀, 과제분리, 내가 아니다

  좋은 기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좋은 기분이 잠시 균형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당나귀’, ‘과제분리’, ‘내가 아니다입니다세 가지가 저의 감정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당나귀와 ‘내가 아니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차용했습니다. 과제분리는 아들러의 ‘과제 분리’에서 가져왔습니다.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불량배에게 봉변을 당했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왜 대항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당신은 당나귀에게 차였을 때 맞서 걷어찹니까?” 살면서 당나귀에게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에게 작정하고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 그들(당나귀)의 평상시 행동에 감정을 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길에서, 음식점에서, 커피숍에서, 전철에서, 버스에서, 백화점에서, 공원에서 어디에서나 당나귀를 만납니다. 갑자기 당나귀의 뒷발에 걷어차이면 감정이 상합니다. 감정이 상하면 감정에 부응하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나를 찬 당나귀를 세차게 한 대 차줍니다. 걷어 차인 당나귀는 나에게 달려듭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두 마리의 성난 당나귀만 남아 뒤엉켜 싸웁니다. 발길질이 끝나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분탕질을 칩니다. 걷어 차인 엉덩이만 아픈 것이 아니라 흙탕물이 돼버린 마음은 한참을 지나야 깨끗해집니다.      


  사실 나를 걷어찬 상대만 당나귀는 아닙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당나귀인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당나귀로 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발길질하는 당나귀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당나귀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당나귀의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채이지 않으려면 당나귀라 판단되는 사람 근처에 가지 않아야 합니다. 또는 당나귀의 발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를 공격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 이런 행동이 당나귀 뒷발의 사정권 안에 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당나귀에 차였다면 어떤 대응도 하지 말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야 합니다. 당나귀는 의도를 가지고 발길질을 하지 않습니다. 당나귀는 본능적으로 발길질을 합니다본능적인 행동에 대응하면 자신만 피해를 봅니다대응한다고 해도 상대의 본능은 멈추지 않습니다나의 나쁜 감정만 지속됩니다당나귀가 어디 있는지 찾을 필요는 없지만 당나귀를 만나면 같이 당나귀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아들러는 ‘과제분리’를 말합니다. 나의 과제와 남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면 혼내고 야단칩니다.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닙니다. 아이가 본인의 과제를 하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부모의 과제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과제를 하지 않는 것을 부모가 할 때까지 채근하며 화를 쌓는 것은 ‘과제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선 혼선을 빚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를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과제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해야 할 것을 모르는 상태라면  해야 하는 것을 찾는 것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해야 할 것을 아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아이의 선택입니다. 부모의 잣대로 판단해서 강요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에 선을 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공부하지 않는 아이를 훈육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합니다. 그럼, 공부는 아이의 직무인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배우는 것이 아이에게 부여된 직무라고 확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학교 공부에 배제되거나 불리한 아이는 직무유기라는 원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까? 학교 공부가 모든 아이에게 행복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의 공부를 포함한 생활에 대한 훈육을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모범적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부모의 직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합니다. 아이에게 부여된 일이 아이의 직무는 맞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직무에 죄책감을 갖는 것보다는 아이의 과제는 아이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행복하며, 행복을 나눌 수 있으면 그것이 진정한 직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그 길이 학교 공부, 도덕적 덕목으로 한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속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부와 도덕이라는 울타리 안의 모든 것이 인간의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나, 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어떤 울타리로도 가두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다’라는 말도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비방하는 말에 제자들이 “스승님은 왜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십니까”라는 말에 “그가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는 대답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험담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험담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맞장구를 칩니다. 한 사람이 가세하고 두 사람이 가세하면 모두 신이 납니다. 뒷담화에 즐거워하는 것은 ‘나는 그렇지 않기에 그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를 뒷담화에 실어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미소 짓습니다. 누군가를 아래로 내려서 나를 높이는 방식은 지속가능한 행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이런 방법은 안 좋은 것을 꺼내야 하기에 자신의 마음을 탁하게 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험담의 대상이 자신이면 어떨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나서 상대를 응징하고 싶어 집니다. 잘 생각해 보면 상대가 한 말은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의 일면에 대하여 자신의 감정을 실어 말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나를 정확히 그려내지 못합니다. 그가 그린 대상이 내가 아닌데 분기탱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험담은 본능입니다. 험담은 실재보다 부풀려질수록  재밌습니다. 가상의 인물을 나와 동일시하여 화를 내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공상소설의 작가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아닌 나를 말하고 싶은 사람은 많을 수 있습니다그때마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가서 확인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그들은 판타지 소설을 쓰며 즐거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기분과 감정을 지키는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당나귀’, ‘과제분리’,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좋은 기분과 감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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