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아래 Oct 09. 2024

당신을 가만히 두면

나로 편안하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가만히 두면 오랫동안 뭔가를 빤히 바라본다.


주로 사람을,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을.


그게 책이든 건물이든, 뱉어놓은 껌이든, 시장 풍경이든.


그것이 지루해지면 어느새 나는 하늘을 본다.


그리고 하늘에 맞닿아있는 나무의 잎사귀를 본다.


빤히 바라본 것들은 어떤 감정을, 때론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이 되었건 다 좋은 것임은 틀림없다.


왜냐면 그것들은 모두 내가 '쓰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소화와 배설처럼 내게는 생명의 문제처럼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일이다.


보고, 생각하고, 쓰는 일.


애초에 내가 만들어질 때부터 정해진 작동원리처럼 일련의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반복된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몸이 단단히 고장 났었다.


목과 어깨가 굳어오고, 심한 두통과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대장과 방광이 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존재를 외쳐대는 탓에 삶은 극기훈련이 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쌓여있던 것들을 뒤늦게 천천히 소화시켜 쓰기 시작한 후로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늘 뿌옇게 느껴지던 눈앞도 점점 선명해지고, 숨도 잘 쉬어진다.


무엇보다 가장 좋아진 건 더 이상 '죽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일의 하루가 너무 기대되어 잠을 설친다.


오늘도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동이 트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주에 용량을 두 배로 늘린 잠자기전 약이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달뜬 기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생의 기운이 정확히 감지되는 충만한 느낌을 준다.


심장은 여전히 제 속도로 뛰고 있지만 마음은 스노볼처럼 차분하게 들떠있고,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맑고 또렷하다.


이런 상태가 내 삶에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 때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히 몰입되는 경험, 내 영혼이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내가 옳은 길로 들어섰을 때 내 영혼이 보내는 확신이다.


방황의 끝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의미 없는 방랑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본디 내가 타고난 작동방식에 따라 삶을 움직여보는 시간들이 쌓이자 자연스럽게 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마치 조각처럼.


조각가의 잘 계산된 섬세한 손끝에서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그의 영혼에서 덩어리는 또렷한 상이 되어간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어떻게 마지막 문장을 맺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행위 그 자체에서 이미 완결성을 가진다.


행위의 완결성이 작품의 완결성으로 연결될지는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나 자신만이 알 수 있지 않을.


완성작을 알 수 없음에도 조각가의 마음과 손끝이 하나로 긴밀하게 잘 연결되어 있다면 적어도 다시 방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천천히 골목길을 운전하며 사람들을 본다.


눈을 본다. 그 사람의 눈이 향하는 곳을. 그리곤 그 사람의 몸짓을, 그 안에 배어있는 삶을 대하는 방식을 상상해 본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내 안에 있다. 뒤져보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내 안에도 있다.


나는 그렇게 사람에게 연결되고, 낯설던 세상이 딱 그만큼 친숙해진다. 내 세상이 딱 그만큼 넓어진다.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