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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아래 Nov 10. 2024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의 글쓰기


오랜만에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을 읽었다.


그간 두어 권의 소설을 출간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소설책에 마음이 가지 않아 찾아 읽지 않았었다.


몇 년 전 한 에세이를 통해 처음 그녀를 알게 된 후로, 한동안 푹 빠져 초기작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책을 거슬러 찾아 읽었었는데 오랜만에 검색창에 이름을 넣었더니 최신작 에세이가 떴다.


결이 맞거나 매력적인 사람의 에세이 읽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체력 소모 없이 내 공간에서 편안하게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깊은 생각을 털어놓는 사람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여러 사람 말고 단 한 사람.


나는 그 단 한 사람이 궁금하다.


무엇 때문에 슬퍼지는지 묻고 싶다.


슬픔이라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들과 깊숙한 곳에서 맞닿아있기에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푹 빠져 얘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


그것이 다분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일수록 그 사람이 더 좋아진다.


그 사소한 것이 한 사람의 필터를 거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래서 또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은 평면의 세상을 마법처럼 부풀려준다.


섬세한 이는 자신의 깊은 슬픔에 닿을 수 있고, 이를 잘 발효시켜 자신만의 색과 향으로 짙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슬픔을 외면한다.


웃는 얼굴이나 화난 얼굴, 무덤덤한 얼굴 뒤로 자신의 슬픔을 능숙하게 감추게 되는데 나의 경우는 웃는 얼굴이었다.


다만 나는 항상 가면 뒤 얼굴이 자기주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다가 자아분열로 미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당신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나요?"라고 물었다가 그의 눈에 정직하게 떠오르던 당혹스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몇 번을 껌뻑거리다가 "나는 그런 게 없는데...."라고 말했다.  


슬픔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열지 못했거나, 자신의 슬픔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아픈 사람이거나.


어떤 경우가 되었건 나는 그것에 대해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으며, 그의 슬픔을 꺼내어 주고 말겠다는 결의에 찬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3년여가 흐른 지금, 내가 점쳤던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틀렸음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가설에 힘이 실리고 있는 중이다.


슬픔을 감지하는 제 육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마치 예민한 후각처럼, 슬픔을 깊고 내밀하게 감지한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시련들을 함께 나누고 있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해 내가 유난히 슬픔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들 속에서 기어코 아주 작은 슬픔이라도 찾아냈고 그것을 아주 세세한 분류 기준에 따라 구분했으며,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 과대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 그것은 살아가는데 때때로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슬픔에 매우 둔감한 남편과 10년을 넘게 살다 보니, 나 역시 작은 슬픔들에 점점 무뎌져가며 일상의 에너지 효율을 높여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예민한 슬픔 감지 능력은 때때로 과유불급이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 자체가 그것을 무뎌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숨 쉬는 일이 의식의 지점으로 올라와, 내가 자주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던 나의 슬픔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실은 슬픔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변태 같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슬픔과 고통을 털끝까지 자세히 묘사하는 글에 끌렸고 그런 인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쓰는 글들은 하나같이 슬픈 이야기였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 그러니까 공황발작이 오기 전, 최근 일이 년간 머릿속으로 문장을 쓰는 버릇이 생겼었다.


머리를 말리면서, 운전을 하면서, 일상의 순간에 마치 타이핑을 치듯 머릿속에 문장 하나를 쓰는 것이다. 막연한 생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명확한 한 문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금방 흘려버렸고, 이제 와 보니 그것은 내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쌓여 숨이 막히게 했던 것 같다.


밀려두었던 일기를 몰아 쓰듯 나는 요즘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글로 쓰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


마치 하루 3번 약을 먹는 것처럼 꼬박꼬박 쓰고 있다.


흰 화면을 띄워두고 앉아 내 안에서 떠오르는 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바로 단어나 문장으로 만들어 내 눈에 보이는 글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쓰다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한참을 생각하는 일도 좋았다.


첫 문장을 시작하고 나면 끝 문장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좋았다.


내가 묻고 내가 답했다. 어디서 그런 답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매일 쓰다 보니 글을 쓰는 일 자체를 내가 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글 쓰는 일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으려 핸드폰 메모장을 항시 옆에 두었다.


자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했다. 그러고도 계속 잠이 들지 않을 때면 새벽 3시든 5시든 일어나서 글을 썼다.


피곤하면서도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앉아 글을 쓸 생각에 설렜다.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아하긴 했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나를 보는 것만으로 나는 나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되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슬픔을 꺼내어 적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가리는 법부터 배웠다는 것을.


그것이 소극적으로 버티는 삶의 방식을 내게 심어주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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