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by 하늘아래

언니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회색이야.
그런데 물을 많이 탄 회색.
언니가 건강할 때는 회색에 초록 한 방울을 넣고 물을 아주 많이 탄 색이야.
불건강할 때는 진한 회색. 그런데 그 때도 물을 많이 타야 해.





나만의 고유한 색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망으로 변했더랬다.


물론 조심스럽게 혼자만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열망이긴 했다.


회색이라...​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색이라 처음엔 의아했지만, 곧 동생의 눈이 꽤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 나뭇잎이 있는 풍경을 좋아하긴 하지만, 역시나 내가 가장 편안한 날은 비가 오는 흐린 날이다.


많은 이들이 성가시게 느끼는 비 오는 날의 여타 수고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나는 비 오는 날이 편안하다.​​




회색은 무채색의 하나로 검은색과 흰색을 섞어서 만든다.


밝음과 어둠, 선과 악, 옳고 그름, 빛과 그림자, 순수와 타락, 삶과 죽음.


하나의 선상에 놓인 끝과 끝, 그것들에 나는 늘 관심이 많다.


한 극단에 매달려있다 보면 어느새 다른 극단으로 내달리기도 하고, 그러면 필시 혼란스러움이 뒤따라와 늘 뿌연 막으로 덮여있는 기분으로 살았다.


다만 동생의 말대로 나의 명도는 그 선상에서 어느 극단에 치우쳐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했다.


아주 어둡던 시절에는 방에 불을 켜지 않은 채 지냈다.


내 생애 다시 그런 날이 찾아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완전히 맑아질 자신도 없다.


그저 동생의 말처럼 나의 채도를 높이기 위해 물을 많이 더하는 노력을 해 나갈 뿐이다.


물이라는 것이 가진 물성은 나를 끌어당긴다.


모든 것에 차별 없이 스며들고, 끊임없이 변하며 동시에 변하지 않는 것.


살아있는 것들의 원천이 되며, 각자의 모습으로 자라게 하는 것.


또렷한 나만의 색을 갖고 싶다는 열망과 모든 것에 스며들고 싶다는 나의 열망은 그 자체로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된 열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본다.​​





색상의 채도를 낮추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회색을 섞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물을 섞는 방법이라고 한다.


선명한 것들은 예쁘지만 오래 보기엔 눈이 피곤하다.


실제로 나는 햇살이 쨍쨍한 맑은 날이 길게 지속되면 피로를 느끼며 어느새 비가 오길 기다리곤 한다.


물을 섞은 회색으로 다른 색상들에 스며들어가면 모든 색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다.


색을 완전히 해치지 않고도 편안하게 채도를 낮추어 함께 공존할 수 있다.



글을 쓰고 보니 동생이 내게 지어준 색이 썩 마음에 든다.


최근 매일같이 나를 옆에서 지켜봐 준 터라 더욱 그렇다.


나의 건강한 성장 방향에 대한 암시까지 더하여 완벽한 명명이었다.


회색에 초록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노력.


초록은 생명의 색이다.


살아있는 것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법.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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