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고백
아침 기온이 묘한 갈등을 일으킨다.
긴소매 옷을 꺼내 입어야 할지, 여전히 반소매로 버틸 수 있을지 잠시 망설인다.
거실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선선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 이럴 땐 늘 옷차림이 문제다.
사랑이 산책을 준비하려고 배변 가방을 메는 순간,
녀석은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다.
벌써 목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낑낑대며 재촉한다.
마치
“얼른, 나가요!”
하는 것처럼.
사랑이의 눈빛은 매번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 반짝인다.
목줄을 채워주고 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아침 공기가 훅 온몸을 감싼다.
집 안에서 느낀 서늘함과는 또 다른,
뺨을 스치는 생생한 기운이다.
긴 옷을 입을 걸 그랬나.
요양병원에 있는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날씨가 쌀쌀하니 긴소매 입고 다녀요.”
‘목소리가 긴소매는 무슨’ 하는 낌새다.
몇십 년을 같이 살다 보니 느낌만으로도 알게 된다.
분명 안 들을 소리를 또 했다.
아침 6시경에 산책을 나가면 좋은 점.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강아지들끼리 지어대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산책길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모으다가
오늘 아침에 쓰레기통에 다 버렸다.
하루에 두세 개씩 주워 모아 탁자에 올려 사진을 찍었다.
잘 익은 알밤처럼 생겼는데 알밤은 아니고
상수리나무 비슷하니 꿀밤인가
하루는 남편을 데리고 가서 떨어진 열매를 구경시켰다.
남편은 아는 체를 했다.
밤이 덜 진화된 것이라나
그러면서 이빨로 깨물어 맛을 보려 했다.
나도 궁금하여 쳐다보니
속은 흡사 알밤이었다.
나도 한번 깨물어 보았다.
“머큐, 헵, 에퉤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했는데
뭐던 모르는 것은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무용담 삼아 딸하고 손녀한테 얘기했다 ‘
손녀가 말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공원에서 떨어진 열매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단다.
딸은 말했다.
어디 다니면서 모르는 것은 손대지 말라고 했다.
다 늙어 가면서 궁금증이 가했나 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열매는 독성이 강하여 다람쥐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람쥐가 똑똑하네.
병원에 갈 일이 있어 잠깐 집을 비워야 했다.
사랑이는 뒷베란다에 두고, 혹시나 몰라 입마개만 씌워 두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서둘러 다녀왔다.
다행히 예상대로 일은 금방 끝났다.
집에 돌아오니,
유리문 너머에서 사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짖지도 않고, 그저
‘뭐 이리 빨리 왔어요?’
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얌전하고 의젓해 보였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상황은 달라졌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시라고 떠준 물은 뒤집혀 작은 한강을 이루고 있었고,
방석은 물웅덩이에 빠져 볼품없이 젖어 있었다.
기저귀를 채워주지 않은 게 화근이었는지,
바닥 여기저기에 흔적도 남겨 놓았다.
그 와중에도 사랑이는 입마개를 단단히 찬 채,
나를 힐끗 보더니 거실로 냅다 내뺐다.
마치
“나도 심심하고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고 도망치는 듯했다.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금만 얌전히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몸이 지쳐 쉬고 싶은데,
사랑이는 짧은 시간에도 쉼 없이 분주했던 모양이다.
저 작은 몸 어디에 그런 체력이 숨어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녀석의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다 보면
화가 오래가지는 않는다.
남편이 다 나을 동안은 우리 둘이 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