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후회는 안한다
7월, 8월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느덧 수능 D-DAY 100일이 깨졌었다.
나는 사관학교 1차 시험을 마치고 여느때처럼 생각중이었다.
다행히 문제 유형이 수능과 유사해서 준비한 만큼 실력 발휘를 한 것 같았다. 학교는 수시 발표로 떠들썩했고, 친구들은 한 명씩 결과를 받아들이며 희비가 엇갈렸다. 조용히 울기도 조용히 웃기도 하였다.
나는 ‘과기원’ 을 비롯한 여러 대학교 학교장 추천을 받지 않기로 했다. 학교마다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에게만 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나보다 더 간절한 친구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싶었다. “전 다른 길이 있어요. 아시잖아요, 저보다 그쪽 길에 더 관심많고 간절한 친구한테 양보할게요”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과학자 혹은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그 꿈과 조금 다른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1차 합격, 그 해방감 속에서 잠시나마 포근함
예열 삼아 봤던 대학 1차 시험 결과가 나왔다.
함께 경찰대와 사관학교 시험을 치른 친구들도 각자 합불 여부를 알게 됐고, 나는 두 곳 모두 1차 합격이었다. 체력 검정, 면접만 남았다. 사실상 큰 결격사유만 없으면 합격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기에, 수능에 대한 긴장감은 줄어들었다.
10년 넘게 운동부 생활을 해왔기에 체력도 자신 있었다. 1.5km 달리기는 4분 45초, 팔굽혀펴기 1분에 40개 이상, 윗몸일으키기는 50개도 가능했다. 그래서 체력 검정 준비도 따로 하지 않았다. 면접도 진솔하게 할거였기에 마찬가지였다. 진솔함이 내 무기였다.
1차 합격 소식을 학교, 가족, 친구들에게 알렸고, 다들 기뻐했다. "드디어 우리 학교에서 경찰대 간다"며 선생님들이 자랑스러워했다. 아마 가족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찾아온 불안
나는 더 나은 아들이, 더 떳떳한 내가 되기 위해 그 후로도 열심히 공부했다. 두 대학교를 안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의대에 가서 아버지와 같은 환자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축하해, 잘됐다, 무조건 넌 합격이야 이 말들이 무색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불안이 찾아왔다. 아마 그게 내가 처음 불안장애를 겪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음속의 씨앗이 발아된 첫 순간.
"뇌전증을 앓는 내가 경찰대나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까?"
입학 질의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관련 조항도 찾아봤다. 볼수록 마음은 무거워졌다. ‘결격 사유’라는 단어들이 내게 칼처럼 다가왔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나도 알고 있었다. 1차 합격을 누구보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통과한것도 아니었고, 뽑는 입장이라면 건강 문제를 가진 지원자는 부담일 수도 있다는 걸. 결국 어느 게시글에서는 “어려울 것이다”라는 답변도 받았다. 돌려 말했지만, 사실상 안 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결국, 스스로를 포기했다
면접도 보지 않았고, 건강검진도 아직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는 미리 단정을 내렸다. 체력, 학업, 모든 게 가능했지만 ‘뇌전증’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에 무너졌다. 결국 포기했다. 가족도, 내 몸도, 내 과거도 친구 스승님 그 모두를 등졌고, 나는 스스로 ‘패인’이 되었다.
뇌전증 고작 그거에 겁을 먹어 숨었다.
성인이 된 후 이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그냥 숨기고 갔어야지”라고 말한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나도 그 당시에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엔 뇌전증 환자의 교통사고, 사회적 문제들이 잇달아 보도되던 시기였다. 오해가 한층 쌓여있었고 사회의 인식이 안좋았었다.
나는 조심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 발작으로 누군가에게 피해가 생기면?
그 생각이 발목을 붙잡았다. 통제되지 않는 증상 속에서, 나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어떠한 조건에서만 발생한다면? 이 아니라 불특정한 조건이었기에 더 무서웠다. 난 내 미래보단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싫어했기에 면접을 포기했다. 아마 지금 다시 돌아가도 같은 판단을 했을거다.
그렇게 흥미를 잃었다.
흥미를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날 지켜주고 힘을 준 태양보단 달이 좋아졌다. 생각을 많이하는 시간은 길어졌고 그건 그대로 나의 감성적인 부분을 키워줬다.
성장한 현재, 과거를 돌아보다
고3, 9월 모의고사를 대충 쳤다.
이미 모든 게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수능을 치는 것도, 의대를 가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의대를 가면 뭐가 달라질까?"
"수면은 어떻게 챙길 건데?"
"밤을 새면 또 쓰러질 거잖아. 그럼 기억 잃는 건 당연하지 않아?"
"이제 공부가 좋다고 재밌다고 무리한 노력 못 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약속이 중요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을 잃고,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으며 살아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럼 너도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꼭두각시랑 뭐가 달라?"
"그 약속, 정말 너의 꿈이 맞는 거야?"
"아니면 그냥 누군가의 약속를 목표처럼 믿고 살아가는 건 아니야?"
그때,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곧 수능이었다. D-day가 100일에서 10일을 깨면서, 실감이 제대로 났다. 감정이 교차했다. 처음엔 아예 보러 가지 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 실력이 궁금했고, 잘 치면 바랐던 대로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결국 응시하기로 다짐했다. 이왕 한 거 엔딩이 어떻든 끝은 봐야하니깐.
시험 일주일 전쯤, 기숙사를 나와 어머니를 보러 갔다. 마지막으로 뵌 게 한달 전이었지만, 어머니는 어색해하셨다. 나도 어색했다. 당연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3 11월까지, 우린 서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4년동안 우리가 만난 건 단 하루씩의 조각 같은 시간뿐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1일,
그가 떠난 날부터 3일,
내가 쓰러지고 눈을 떴을 때의 1일,
경찰대에서의 1일,
4년 동안, 우리는 고작 6일을 만났다.
수능을 앞두고, 나는 친구에게 물리, 수학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마을을 둘러보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걸으며 말로는 다 하지 못한 마음속의 대화도 나눴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계셨다. 나약했다.
나는 감정이라는 단어를 마음에서 지워낸 채, 그를 닮아 강해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부딪혔다.
어머니는 불안해하셨다. 내 인생의 끝이, 삶의 엔딩이 좋지 않을까봐 걱정하셨다.
스스로 뇌의 신경을 끊을때부터 엔딩은 정해져있었지 않았을까.
어릴 적 나는 따뜻하고 순수하고 밝은 아이였다. 순둥이처럼 말 잘 듣고, 상상력을 뿜어내던 아이.
하지만 지금은 차갑고, 공허하고, 단단해지고, 철저히 계획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수능 전날, 나는 미리 시험장을 가보았다.
아, 여기가 내가 앉게 될 자리구나.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예뻤다. 그가 보고 싶어했던 하늘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새벽 무렵 겨우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나 수능장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싸주셨다.
몇 년 만이었을까.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을 먹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