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9월이 되자, 학교는 익숙한 분주함으로 가득 찼다.
대학 진학을 향한 첫 관문,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 시작된 것이다. 겉으로는 냉정한 숫자와 기준이 오갔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신중함과 크고 작은 기대와 망설임이 얽혀 있었다. "나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한 계단 위를 노렸고, 누군가는 현실을 택했다. 소위 일컫는 상향, 하향, 그리고 적정. 각자 선택했다.
수시는 단순히 많이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최대 다섯 장.
그 제한된 선택지를 어떻게 채울지, 우리들은 머릿속 계산기를 몇 번이고 두드렸다. 보이지 않는 눈치싸움이었다. 각자의 책상 위에는 한 줄의 학교 이름이 아닌, 수많은 고민의 층위가 얹혀 있었다.
나도 썼다. 정시파이터인 나도 논술 몇 개, 수시 몇 개. 논술은 접수 개수에 제한이 없었다. 붙을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카드 정보를 입력했다.
지금 생각해도, 접수비는 꽤 비쌌다. 그 나이에 쓰기엔, 제법 묵직한 액수였다.
시간이 얼마나 귀했고 빨리 흘러갔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또한 이 사회에 깔린 ‘비교’와 ‘시선’ 속에서 ‘고3’이라는 이름표는 묘한 힘을 가졌다.
마치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처럼. 지니고 있으면 세상이 전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서 있는 자신만은 더 깊은 자신의 눈치를 보러 들어간다.
나는 늘 궁금했다. 수능이 대체 뭐길래, 그 하나로 인생이 갈리는 듯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고 조급한 걸까. 내겐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가기로 했다. 시끄럽게 굴지 않고, 오히려 후배들을 도우며 공부를 가르쳤다. 운이 좋았던 걸까. 과학기술원에서 1년 동안 실험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재능이든, 기회든 나누는 쪽이 더 건강하다고 믿었다. 함께 나누고, 같이 성장하는 방향을 택했다. 물론, 자기 발전은 기본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는 줄이지 않았다. 다만 그걸 꼭 목소리 높여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능은, 분명 중요한 시험이다. 하지만 그 중요함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그걸 남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정말 중요하다면, 더 집중하느라 남의 눈치를 살필 틈도 없을 것이다.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은 바쁘다. 그래서, 누구도 그 사람을 쉽게 건드릴 수 없다.
수능과 가장 유사하다는 그 시험. 재수생, 삼수생까지 모두 참여하니, 등급이 한두 개씩 내려가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이야기다. 그 안에 내가 꼭 포함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감을 가져야 비로소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나의 강점과 객관적인 실력을 냉정하게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승리를 쟁취하자.
살면서 어떤 행위를 앞두고, 미리 정보를 찾아보는 습관은 분명 유익하다. 준비는 언제나 옳으니깐. 다만 그 과정에서 경쟁률, 난이도, 후기 같은 것들을 피치 못하게 접하게 된다. 그게 지표가 좋든, 나쁘든 겁먹지 마라.
우린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도 우리가 아니니까. 다른 결과를, 우리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운이 좋게도, 나는 1등급 커트라인에 걸렸다. 껍질만 1이고 속은 2인 등급.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 해는 유독 커트라인이 높았다. 재수생 형, 누나들의 내공이 만든 결과였을까. 그 시험을 계기로 다시 한번 실감했다. 세상엔, 정말 잘하는 사람이 많구나.
점심을 먹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사람 다 제치고, TV에 나오긴 힘들겠는데.’
비록 1등급이었지만, 의예과 성적은 아니었다.
이 성적으로는, 터무니없었다. 나는 다시, 거의 1년 만에 펜을 들었다. 가야만 했으니까.
경찰대와 사관학교 시험을 치렀다. 일종의 예열이었다. 수능 전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고, 현실적으로 등록금, 기숙사비, 급식비가 들지 않는 대학이었기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명감 있는 일을 좋아했다. 군인 출신 지인들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그런 삶의 자세와 사상을 많이 배웠다.
그날은, 가족이 몇 년 만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물론 내가 쓰러졌을 때도 윈치 않은 모임이 있었지만 내가 의식이 없었으니 제외했다. 경찰대 시험장소는 집에서 꽤 멀었고, 나는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려다줄 수 있냐고.
시험장을 향하는 그 하루. 사실, 내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시험은, 그저 핑계였다. 변해버린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예전의 내가 아닌,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이젠 혼자라서 겁을 먹고 울고 있는 애기가 아닌 아버지를 닮아 강해졌다는 것을.
물론, 그녀들을 마주한다고 해서 살갑게 굴 자신은 없었다. 애써 잘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저, 그녀들에 대해 어색한 이해와 작은 용서를 내 안에서 꺼내보고 싶었다. 아무리 미워도, 가족이니까.
무엇보다도, 그냥 보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늘 입에 달고 살았지만, 끝없는 에너지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아프게 만든 약속의 주체. 그 두 여자에게서, 나는 모순처럼 힘을 받았다.
누나의 차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했다. 경찰대 시험. 국어, 수학, 영어. 단 세 과목이었다. 어렵기로 유명하다는 얘긴 익히 들었다. 커트라인도 미리 살펴봤다. 300점 만점에 보통 190점에서 220점. 농어촌 전형과 일반 전형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210점? 한 과목당 70점만 맞으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간과했다. 그 점수를 맞는 학생들은,
놀랍게도 수능을 치면 1등급이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곧 알 수 있었다. 정말, 만만치 않았다. 쉽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19년 동안 아들을 지켜보며, 네가 벽을 느끼는 순간을 두 번 봤다.”
첫 번째는 중학교 시절, 과학고에 도전했을 때였다.
그때도 벽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저 다음을 생각했고, 재미를 느꼈고, 더 나아가고 싶었다.
또한 수많은 운동대회에서도 난 지는 걸 혹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국어는 괜찮았다. 풀 수 있었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짠 나의 계획은 분명했다. 국어 60점, 수학 80점, 영어 60점. 특히 수학은 나의 자존심이었다. 전략 과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지를 펼치자, 낯설었다. 문제는 분명, 생각을 요하는 듯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접근이 보일 듯 말 듯,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가고 있는데 멍하게 문제를 바라보는 내가 한심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생각 잘하면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풀리지 않았다.
그 간극이, 결국 나를 무너뜨렸다. 정확히 나의 실력에 대한 의심, 신뢰, 하락.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되는’ 그 감정.
그 혼란이 생각보다 빠르고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시험을 마치고 생각했다.
무엇이 패착이고 멘탈을 무너뜨렸을까.
준비 부족? 과한 자신감? 아니면, 앞서 말한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였을까.
결국, 시험이 끝나고 차에 올랐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나는 그녀들을 뒤로한 채, 기숙사로 향하는 먼 길을 돌아갔다. 시험은 어떨지 몰라도 몇 년 만에 그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밤은,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불확실한 결과, 오랜만에 느껴진 벽, 그리고 두 모녀
오는 길에 생각하지 못한 것과 그리고 그 벽을 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조용히 떠올렸다.
뇌전증 약 때문일까.
정말 그 약이 내 생각을 어둡게 만들고, 회복을 더디게 하며, 부정적인 상상을 부르는 걸까. 같은 지병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부작용이 존재하는 거였나?
답을 찾고 싶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것도 내 추론일 뿐이었다. 약의 성분이나 호르몬과는 상관없이, 어쩌면 모든 건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해석일지도 모른다. 설사 정말 약의 부작용일지라도 정말 그러할지라도,
몸과 마음은, 결국 생각하기 나름.
그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각의 긍정 전환’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