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만한 곳

(29) 언덕을 비비다

by 블라썸도윤

신년엔 인적이 흔하지 않은 곳으로 청정 공기 쐬러 가자고 했어요. 사위네가 몇 시간 전에 연락이 왔죠. 댕댕이(강쥐)도 같이 숲 공기 마주하러 청양으로 몸을 달려 줬어요. 이 질주는 몸을 달래기 위한 신년의 마음 털기였답니다.

비교라는 것은 인적 드문 곳과 몰리는 곳의 공기 차이지 싶어요.


겨울이 한파로 기승부리는 온도지만 사람의 잽싼 걸음과 활동성은 차가움을 이길 수 있어요. 매년 겪어서 느낌을 아는데 정월은 보통 맑은 날이에요. 지나간 일기에도 어제랑 오늘 그렇게 볕이 무지 좋다로 적혀 있거든요.


청양은 제가 둘째 아이 낳고 몸조리? 도중 가출했던 친절한 곳이어요. 제 브런치북 1권에 사유가 있습니다. 칠갑산이 아름드리 사방을 둘러싸고 산세가 높지 않죠.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새 눈이 송골송골 벌겋게 봐주란 듯이 이글대고 있었어요. 이곳을 삼십 년 만에 몸을 들이니 변화무쌍 하나 심정은 감사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청양 시내에 도착해서 예약해 논 국밥집에서 소고기 육즙 맛이 제대로 나는 우거디 국밥으로 시장기를 채웠답니다. 양평해장국과 비스름하면서 소고기 해장국과도 비슷한 맛이 일품이었는데 청양의 별미 맛집이었으나 한 끼로 만 것은 이틀을 경상도에서 공수해 온 청국장에 김치를 넣고 끓여 먹었기 때문이죠.


국밥집 바로 맞은편엔 분식집이 있는데 호떡이 유명을 팔고 있었어요. 기름에 튀겨지지도 않고 가장자리까지 고르게 잘 익은 호떡은 구기자를 첨가해서 갈색빛이 감돌며 씨앗도 적당히 들어가서 맛집답게 구미를 당겼습니다. 국밥을 국물이랑 찬까지 깨끗하게 드링킹했는데도 호떡이 채워질 배는 따로 있었지요. 이곳까지 왔는데 먹지 않고 가면 큰 손해를 볼 것 같죠. 종이컵에 내주신 고소한 호떡은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주인아주머니의 친절인 사랑 같이 살살 녹습니다.


허기를 따뜻하게 데웠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햇살의 온기를 받아 가며 출렁다리를 걷습니다. 파주의 출렁다리보다 아주 약한 미동은 어린 아기들도 호기심 가득 즐겨보라고 걸쳐놓은 다리 같았지만 다리 밑의 양쪽으로 파랑과 둔탁한 옥빛으로 나뉜 물결은 물고기 비늘이 계속 춤을 추는 것 같아 눈부셨어요. 호수가 아주 맑았답니다. 고추와 구기자로 유명한 곳인데 냉랭한 겨울 평일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공기는 더욱 청정했지요.



며칠 전부터 계획을 짜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사실 다른 날 보다 노곤해서 해가 질 무렵 댕댕이 숙소에 와서 여정을 풀었습니다. 몇 년 만에 화투장도 만져봤어요. 누가 따지도 잃지도 않았는지 동전과 천 원 지폐 두 장이 있었던 그대로 제 동전통에 들어있네요.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방 둘 욕실이 두 개 있는 곳에서 새벽 1시경 우리는 잠을 청했습니다. 황토로 빚은 벽돌인데 바닥이 찜질방처럼 철철 끓어도 외풍이 몹시 셌어요. 어릴 적 일반 주택 방에서 잠드는 느낌입니다. 어깨가 몹시 시렸는데 코끝은 공기가 들락날락 시원했지요.


1박을 마친 기분은 쫓겨오다시피 한 그때와는 새삼 다르나 감사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살면서 이런 곳에 와보다니 저는 여행을 다녀볼 기회가 아주 희귀에 가깝게 적었던 사람으로서 크게 감사를 갖게 됩니다.


아침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눈이 부시게 햇살이 좋습니다. 눈썰매와 얼음 썰매를 타러 이름이 있다는 청양 알프스 눈꽃마을 축제에 먼저 당도했어요. 눈썰매는 타이어같이 생긴 둥근 것을 기계가 떠밀어 주어 스르륵 경사진 곳을 쑤욱 내려갔어요. 둥글게 원을 그리듯 내려가도 부딪히는 곳 없이 재미가 있네요. 어린이도 충분히 혼자 즐길 수 있습니다. 얼음 썰매는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끔 양옆에 얼음벽을 쌓았는데 몸이 비뚤어지면 얼음벽에 팔꿈치를 내주며 쓸려가게 됩니다. 그래도 잡은 줄을 내려놓으면 절대로 안 되지요.



화천 축제 때 얼음 얼리고 조각 만드는 극한 작업 과정을 알고 난 후엔 거대한 썰매장은 피했어요. 엄동설한에 며칠씩 야간작업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성에 낀 눈썹을 보면 오싹합니다.


한쪽 양지바른 곳에선 한 봉지 오천 원 하는 군고구마를 샀는데 저희가 첫 손님이라며 곱으로 세 개를 더 넣어 주셨어요. 이건 집에 가서 먹기로 하고 군고구마랑 같은 가격인 밤을 한 봉지 사서 굽기로 했어요. 굵은 통나무 새로 밤이 담긴 바구니를 흔들거려 주는데 껍질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돼야 익습니다. 맛은 밍밍합니다. 날짐승이 버려진 것을 쪼아 먹으러 오질 않는 걸 보고 높지 않은 길을 내려와서 파스타집에 들렀어요. 따끈따끈하니 고소하고 짜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서양에 와서 먹는 기분이 났습니다.


배가 덜 차기도 했지만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어제 그 호떡집엘 또 왔어요. 어묵과 호떡은 또 배의 남은 공간을 채워줬는데 어느 분은 호떡을 세관 사람들과 나눠 먹겠다며 스무 개를 익혀서 포장해 갔답니다. 2일과 7일에 열리는 장날이 맞았어요. 떡을 직접 뽑아내는 방앗간에서 제가 거주하는 곳에서 파는 방망이떡보다 굵은 놈으로 세 줄을 샀어요. 한입 베어 물었는데 예상처럼 쫀득쫀득합니다. 아마도 밀가루가 덜 첨가됐지 싶어요. 값은 같답니다. 이천 원씩입니다.


슬슬 고속도로를 탔는데 날이 훤하니 아산으로 틀어서 카페에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곳이라는데 눈치를 깝니다. 역시 시골스러운 분위기에 기와로 지붕을 올린 인주 한옥점이었어요. 강쥐도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야외 테라스는 온풍기가 켜져 있고 아늑해서 좋았습니다. 다른 팀의 여인이 계속 왔다 갔다 문을 열어젖히고 다니니까 다른 분이 잔소리 두 번을 했어요. 두 번째도 열어놓은 겁니다. 뭐가 급한지 얘기 소리는 급한 게 하나도 없던데요.


신정애 작가님의 최신 글에 ‘아이들은 닫지 않는다’에서 아이들이 등을 돌린 문을 열어놓고 다닌다는 글이 떠올랐죠. 제가 선호하는 국산 차는 두꺼운 찻잔에 담아져 나왔어요. 어제는 쌍화차를 마셨으니 오늘은 배와 생강을 잘게 썰어 넣은 도라지 차를 시켰어요. 스타벅스보다 저는 이런 옛 찻집이 정겹답니다. 아버지랑 차를 마시던 곳이기도 해요. 한참 예전엔 다방에서 쌍화차에 날달걀 작은 것을 깨뜨려서 달처럼 넣어줬는데 아버지랑 저는 이걸 마시러 다녔어요. 제게 권하고 사주셨답니다.

집 와서 군고구마 반 개를 먹은 후 검정 빨래와 흰 빨래를 분류해서 세탁하고 다음 날을 위해 깊이 잠들었어요. 그런데 누누이 일러줬건만 막냇동생이 전화를 걸어 꿈 얘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기분이 좋은 꿈이든 찝찝한 꿈이든 잠자리 털게 되거든 밖에 나가서 나무나 돌멩이든 상관없이 말을 털어내. 그들은 말없이 다 받아줄 수 있어.


그러마 했어요. 사람들은 희한합니다. 내게 뒤숭숭한 꿈 얘기를 하려고 해요. 새해 벽두부터 그러지 말라고 모른 척했습니다. 모른 척하는 거 두 개를 체크했어요. 지켜냈습니다. 살면서 생도 까야 마음속에 배기는 것 없이 살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모르는 체하며 살라는 것은 오즈의 마법사 작가님이 제가 인맥으로 힘들어할 때 명언처럼 알려주신 겁니다. 다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정 아침에 온 전화도 내겐 달갑지 않은 것이어서 회피했답니다. 나중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역시나 본인 글 좀 봐달라는 예고된 전화였죠. 본인만 라이킷이 중요하지 않지요. 이것이 올해의 나를 위한 생까기 첫 번째가 됩니다.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내기에 불필요한 전화도 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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