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는 이미 시로 썼어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사촌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사실 그들의 아이들이 마냥 착하게 어른들 말만 듣고 그대로 자라주는 아이가 되지 않길 바란다. 아이 부모들에겐 내색하지 않고 겉치레로 따뜻한 말을 전달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 아이들은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올바른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고 역시 행복해지길 기도한다. 대신 그 예쁜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이정표를 스스로 만들기 바랄 뿐이다. 자신의 엄마와 아빠에게 맡겨 놓지 않고, 스스로.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때로는 사랑하는 만큼 굴레를 아들에게 씌웠던 것 아닌가요? 내 부모님이니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굴레를 씌웠던 건 맞잖아요. 그만큼 나는 사랑받았던 걸 기억해요. 그러다 중요한 순간에는 나는 혼란해요. 마치 망망대해에 길 잃은 항해자 같아요.
'아빠, 뒤에 잘 잡고 있지?', '아빠, 먼저 손 놓지 마!'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에서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탈 때 흔히 들었을 하얀 거짓말은 모처럼 정시퇴근하고 자전거를 빌려 놀러 간 한강공원 풍경에 귀엽고 따뜻한 장면으로 덧칠된다. 그러다가 이내 따뜻하게 덧칠된 회상 속에 어릴 적 들었던 한 감정을 끄집어내었다. '억울함'.
'시스템 상 급여날이 좀 밀렸어요. 사정이 그러니 이해해 줘요.', '다른 곳에서 일 안 해보셨구나, 여기는 원래 이렇게 일하는 게 맞아요.', '저희 회사는 수습한테 야근수당이 원래 없어요.' 쏟아지는 업무만으로도 정신이 없던 회사생활에서도 조직과 직원의 성장이라는 어떤 말들이 정말 많았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노곤해진 눈꺼풀에 이런 말들의 온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 후 이 말들에서 다시금 어떤 감정이 피어올랐다. '억울함'.
이렇게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어떤 건 나를 성장시키기도 했다지만, 그때의 나로 돌아갔을 때 내가 과연 스스로 원하던 과정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대게 거짓말들은 하얗지 않았다. 그리고 억울한 응어리 하나를 꼭 심장 모서리 한쪽에 차곡차곡 쌓게 된다. 치유되지 않는 응어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탄생은 나 스스로 바라지 않았거나 어떻게 되길 생각하지 않던 상황들, 휩쓸렸던 상황들에서 나온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억울한 파도 속에 괴로워하는 건 나 한 사람뿐이었다. 휩쓸린 대가는 왜 내 몫이어야만 하는지, 가끔 사람은 억울해할 순 있는 거다. 마음으로 탓해도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