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는 이미 시로 썼어요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을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먼저 어머니는 아들의 손부터 잡고 손톱을 본다.
“얘가 또 쥐어뜯었네.”
어머니는 그럼에도 그만 좀 뜯으라는 말은 더는 하진 않는다. 대신 손톱 상태를 그대로 보고 말할 뿐이다. 그 말에도 아들은 속상함이 있다는 건 잘 안다. 잘 알 수밖에. 시험 기간이 되면,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가 생기면, 부당한 상황을 겪으면, 아들의 몸에서 항상 손톱들이 먼저 희생당해 왔다. 그래서 아들은 손톱을 확인당할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이차성징도 끝나고 성장판이 닫혀 다시는 자라날 수 없는 어른이 된 아들. 그에겐 손톱은 계속 자라나는 희망이면서도 고문이었다. 예쁘게 자라 다듬어진 손톱, 그건 선망의 대상이자 ‘나도 저렇게 될 것 같은’ 희망이었다. 한편 다 물어뜯어 놓은 지금의 손톱은 불안하고 문드러진 속내를 보여주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가을날, 아들은 큰 용기를 내고 집 앞 네일샵을 갔다. ‘남자가 네일샵을 어떻게 가느냐?’는 알량한 자존심 섞인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힘든 마음이 손톱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그만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아 네일샵에 전화를 하고 예약을 했다. 손톱 하는 날 막상 가서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니, 꾸벅꾸벅, 그리고 이내 고개가 수그러지고, 언제 끝난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다 큰 성인 남성의 알량한 걱정은 그저 네일샵에서의 낮잠 앞에선 별 게 아녔다. 요즘도 네일샵에서 손톱을 다듬기라도 하면 바로 잠드느라 바쁘다. 아마 숙면은 네일샵에서 취하는가 보다. 잠자러 가는 네일샵. 마음이 그저 괜찮아졌다.
기억해 보니, '손 이리 줘봐.'라는 전 애인의 설레는 말에도 짧고 피딱지 얹어진 손가락이 부끄러워 웃으며 넘긴 게 종종 있었다. 손을 잡고, 손깍지를 끼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쓰다듬을 때마다 그 사람이 내 예민함과 불안함을 발견할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것일지 모른다. 실은 마음에 돋은 거스러미가 자꾸 신경 쓰였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대신 손가락을 괴롭히는 내 폭력성을 걱정했던 것 또한 맞겠지?
글을 쓰면서 지금 드는 생각은 손을 뜯고 깨물던 마음을 부정하기 싫다는 것. 갉아먹힌 손톱은 그만큼 내가 집중하고, 그만큼 간절해서 불안한 나를 보여주는 것 같고, 그 노력을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 못생긴 손이 자랑스럽진 않지만, 누군가가 손 내어 달라고 하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손을 내주고, 내 거스러미 핀 손의 이유를 물으면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