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는 이미 시로 썼어요
‘나’라는 인형의 짧은 글
어떤 대상들은 내가 마치 플라스틱이나 패브릭 천 따위로 만들어진 줄 안다. 그러니 내가 슬픈 과거를 기억할 뇌 가 없는 줄 알겠지. 쿵쾅거리는 심장이 없는 줄 알겠지. 그냥 마트 매대에 파는 커다란 사람 모습을 한 인형이면 차라리 나았을 거다. 그땐 그게 나았을 거다.
스물다섯 해 전이던가. 사람 모습의 이 인형은, 고학년 형들에게 홀로 잡혀서 집 뒤 인적 없는 아파트 공사장에 세워져 날아오는 축구공을 온몸으로 맞았던 적이 있다. 스무 해 전이던가. 사람 모습의 이 인형은, 남자 같지 않은 말투에 유별난 성격이라고 은연중에 여러 손에 쥐고 놀려졌다. 좋은 친구들이 생겨 적당히 소심하다가도 편하면 재미있는 가면을 쓰게 되었지만, 사람이 많거나 낯선 사람들이 이미 뭉쳐진 곳에 가는 건 여전히 힘들어한다.
그 인형은 사격장의 과녁으로 세워진 뽁뽁이 인형이나 동물 인형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맞은편에 서서 악의 없는 입꼬리들 속에 나오는 으스대는 목소리, 가벼운 장난이고 놀이인 것처럼 웃어넘기는 어깨들, 그러나 반응을 기대하는 호기심 서린 눈동자들 앞에서 그 인형은, 그 인형이던 누군가에게는 오래전 기억을 꺼내기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삼 개월 째, 임시보호로 데려온 개가 있다. 개는 작은 어린아이들과 자전거, 그리고 천둥소리를 정말 무서워한다. 저기 담 너머로 어린아이들이 까르르하는 소리만 나도 꼬리가 가랑이로 숨고 다리가 움츠려든다.
'너는 어떤 과거가 있었던 거니?' 안타까운 눈초리로 개를 바라보지만 그곳을 지나야 만 집에 갈 수 있으니 피할 순 없다. 피해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건 산책시켜 주는 인간인 나만 아는 것일까? 이 개는 항상 그 길이 익숙해질 때까지 고통스러워야만 하나? 반려견 전문가는 영상에서, ‘환경이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하라’, ‘잘 기다리거나 지나가기만 해도 칭찬과 보상을 하라’라고 말해준다. 그럼에도 매일 걷는 그 길목에서는 마치 내가 이 개의 과거에서 거슬러 온 가해자가 된 기분이라 처진 꼬리와 눈을 보면 미안하다.
그래, 이젠 개한테까지 공감하는구나. 그만 이입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