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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딧불 (2)

<고시생 한만오 이야기>

by 도란도란 Jan 07. 2025


한만오의 노래가 끝나자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졌어. 관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는 한만오가 고시 준비를 하면서 힘들때마다 들었던 곡이라고 했어. 이 노래를 부르희망을 꿈꾸었대. 언젠가 자신도 별처럼 빛나는 날이 올 거라고.  


잠시 뒤,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한만오를 비췄어. 무릎 아래에는 종이들이 깔려있었어. 그 종이들이 스크린에 드러났어. 시험지였지.


  "이 문제 하나에 제 인생이 달렸어요. 정답은 꼭 3번이어야만 해요!"  


한만오는 내내 무릎을 꿇은 채 한 문제, 한 문제 채점해 나갔어. 간절한 기도 끝에 떨리는 손으로 한 문제를 겨우 채점했어. 그때 무대 어딘가에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어. 한만오의 읊조림이었지. 

작년 시험에서 모자란 점수는 겨우 0.8점이었다. 한 문제만 더 맞혔더라면 합격이었다. 재작년 시험에선 1.3점. 역시 한 문제 차이였다. 문제 하나가 내 삶을 결정했다. 


잠시 뒤 스크린은 꺼졌고 스포트라이트는 여전히 한만오를 비추고 있었어. 채점에 여념이 없는 한만오만 보일뿐 모든 배경이 깜깜했지. 그때 한만오의 왼편에서 누군가 환영처럼 나타났어. 어린아이였어. 아홉 살 한만오의 홀로그램이었지. 어느새 배경 스크린은 장례식장으로 바뀌어 있었어. 한만오의 과거를 홀로그램으로 표현한 건 찰리의 아이디어였어.


아홉 살 한만오가 관객을 바라보며 말했어.


  "우리 아빠가 죽었대. 아빠가 다니던 공장의 사장이 엄마에게 얘기하는 걸 몰래 들었어. 아빠가 200톤이나 되는 프레스기계에 끼어 질식했다는 거야. 난 200톤이 얼마나 무거운지, 프레스가 뭔지, 질식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래서 난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울 수 없었지. 믿을 수 없는 일에는 눈물도 나지 않아. 저녁이 되면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어." 


잠시 뒤 한만오의 오른편에 또 다른 홀로그램이 나타났어.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책상에 앉아 있는 학생이었지. 열아홉 살의 한만오였어. 공부하는 한만오의 옆으로 중년의 여자가 다가왔어.


  "만오야, 쉬엄쉬엄해. 어제도 새벽까지 공부한 거야? 학원 한 번 못 보냈는데도 혼자 공부해서 반 1등까지 하고,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엄마가 네 대학등록금은 다 모아두었어. 그러니 다른 걱정말고 네가 원하는 대학으로 갔으면 해. 알았지?" 


  "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잠 하나는 잘 자잖아요.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 지금 성적이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대요. 대학등록금도 걱정 없어요. 저도 우리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어요."


무대 중앙의 한만오는 여전히 채점에 집중하고 있었지. 또다시 내레이션이 시작됐어.

나는 열심히 공부했어. 나만 바라보며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지. 선생님은 교사용 참고서와 문제집을 몰래 챙겨주시며 공부를 도와주셨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어. 꿈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지. 나는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라고 굳게 믿었어.


한만오의 양쪽에 있던 아홉 살과 열아홉 살의 홀로그램이 사라졌어. 한만오는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이야기하듯 노래를 불렀어. '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란 곡이었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듯 담담하게 불렀어. 그 담담함이 오히려 듣는 이의 마음은 일렁이게 했어. 나도 한만오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길 함께 기도했거든.  옆에 앉은 고차원 저승 언어 센터의 깐깐한 영도 어느샌가 두 손을 모으고 있었지.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한만오의 시험지 위에 내리는 빨간 빗줄기는 붙들 수 없는 꿈의 파편이 되어 흩어져 갔어. 채점을 마친 한만오는 시험지를 움켜잡고 절규했어.  


  "으흐흐윽, 고작 문제 하나에 이토록 간절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 이게 뭐라고. 난 이제 더는 못하겠어. 벌써 다섯 번이야. 오 년을 이 시험에만 매달렸다고. 이 쳇바퀴에서 벗어날 거야!"


그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어. 한만오가 전화를 받았지.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한만오 씨 죠? 지금 어머니를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빨리 병원으로 오십시오."


한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뛰쳐나갔어. 무대 배경은 종합병원 앞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구급차 한 대가 들어왔어. 구급차 침대 위에는 한만오의 어머니가 누워있었지. 급하게 응급실로 이송되고 나자 한만오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어.


  "김영순 씨 보호자 되십니까? 지금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낙상으로 인한 급성 경막하 출혈입니다. 이미 의식 장애를 동반하고 있어요."


한만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 어머니를 실은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한만오는 넋을 놓고 말았. 무대에는 다시 내레이션이 흘렀어. 

건물 계단 청소 일을 하던 어머니가 실수로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내가 임용고시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급성 경막하 출혈은 예후가 매우 나쁘며 제때 수술한다 해도 진단받은 환자들의 60%는 사망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살아남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그래도 살아 숨쉬고 여전히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었기에 나는 마냥 절망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모아둔 돈은 이미 수술비와 병원비로 바닥이 났다. 이제부터 내가 어머니를 살릴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나를 키워주신 것처럼.  


스크린에 비친 한만오는 잠은 언제 자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일을 하고 있었어. 인간들, 특히 젊은 이들은 자신의 건강과신하곤 해. 한만오는 어머니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은 전혀 돌보지 않았지. 그런 그의 옆을 지키며 걱정하는 한 여자가 있었어. 드디그녀가 등장했지. 한만오의 여자친구야. 이제부터가 뮤지컬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해.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프로덕션 넘버 곡이 흐르고 수많은 코러스 영들이 무대를 채웠어 


아무도 모를 거야
말한 적 없을 테니
아이처럼 울고 싶은 순간들
어른이란 말은 참 그댈 힘들게 하죠
더 외롭게 만들어
힘겨운 걸음으로 먼 길을 걸었는데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는지
어둡고 깊은 곳에 웅크려 앉은 그댈
난 떠나지 않겠어요
아무리 먼 길을 떠났어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이 길 끝에 떠오르는 태양을 만날 때까지
난 곁에 있겠어요

- 임영웅, 온기



   



  "네가 병원비 또 냈어?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


한만오가 격앙된 목소리를 냈어.


  "만오야, 너 지금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 최소한 건강은 챙겨가면서 해야지. 병원비야 누가 내던,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내가 그 정도 도울 자격도 안 되는 거야?"


한만오가 지친 얼굴로 말했어.


  "미안, 화내서 미안해. 너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퇴근하고 매일 병원에 오는 것도 쉬운 일 아니잖아. 네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그러니 너도 이제 좀 쉬어가며 해."  


그녀가 한만오의 손을 잡으며 말했지.


  "나 하나도 안 힘들어. 난 네가 더 걱정이야. 일 조금만 줄였으면 좋겠어. 이렇게 힘들 때는 나한테 좀 기대도 되잖아. 난 언제나 네가 제일 중요해."


한만오를 바라보며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어둡고 깊은 곳에 웅크려 앉은 그댈

난 떠나지 않겠어요

아무리 먼 길을 떠났어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이 길 끝에 떠오르는 태양을 만날 때까지

난 곁에 있겠어요


무대 위에 있던 그녀가 서서히 사라졌어. 그녀도 홀로그램이었지. 이어진 한만오의 내레이션으로 1막은 끝났어. 

삶이 끝이 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지고만 있었다. 절망만 이어지는 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전해주는 온기 덕분이었다. 이렇게 버텨내기만 하면 어머니도 언젠가 기적처럼 깨어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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