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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생의 마지막 오디션 (2)

<고시생 한만오 이야기>

by 도란도란 Dec 24. 2024


한만오 씨는 <금생의 마지막 오디션> 신청서를 보곤 눈을 반짝였어.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지.

    

  "제가 원하던 거예요. 오디션 도전합니다! 특히 특전이 마음에 드네요. 저승에도 고위직이 있다니, 이승에서 못 이룬 꿈, 여기서라도 이루어 봐야겠어요. 근데 저승에는 일자리가 많나요?"     


한만오 씨는 저승을 무위도식하는 곳으로 알았나 봐. 세상에 공짜는 없지. 이승이고 저승이고 일을 해야 살 수 있다고.   

  

  "그럼요. 절 보세요. 어디든 일은 있습니다. 일이 없으면 저승도 살기 어려워요. 곧 알게 될 테지만."     


  "깜두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살던 세상에선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였죠. 전 무려 취업에 5년 동안이나 실패했어요. 거기선 5수생이라고 하죠. 제가 보던 시험의 경쟁률을 들으면 깜두 씨도 깜짝 놀랄걸요. 저승에선 좀 편히 쉬려나 했는데 기대와는 다르네요. 그래도 고위직이라면 이승보단 낫겠죠?"  

   

  "아마도요? 우선 오디션 준비부터 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환생센터를 안내해 드리죠. 절 따라오세요."     


한만오 씨는 오디션 신청서를 후다닥 적고는 환생센터 접수처에서 나왔어. 마치 놀러 온 아이처럼 신이 나 보였지. 인간들의 발을 보면 알 수 있어. 신이 났다는 건 발걸음의 동동거림에서 다 나타나거든. 지금은 마냥 신나 할 때가 아닌데 말이야. 오디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이 정해지는 심각한 상황이란 말이지. 한만오 씨는 애초부터 해맑은 영을 타고났어. 몸을 잃어도 영이 가진 타고난 성품은 변하지 않아. 오히려 몸과 분리되면 타고난 성품이 더 도드라지지. 한만오 씨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쏟아냈어.

    

  "건물이 제법 많아요. 여긴 <고차원 저승 언어 교육센터>네요. 뭐 하는 곳이죠?"   

   

  "인간 세상의 스피치 학원 같은 곳입니다. 오디션 볼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여긴 꼭 등록해야 합니다."      


  "저승에도 학원이 있어요?"     


  "그럼요. 이렇게 중요한 오디션을 혼자 준비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전 가난한 고시생이었어요. 돈도 없는데 무슨 수로 학원 등록을 하죠?"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저승에선 이승의 돈을 받지 않아요. 인간들 저승 갈 때 노잣돈 하라고 상여에 돈 꽂던데, 다 쓸모없는 짓이죠. 여긴 돈 대신 다른 걸 받아요."     


  "다른 거요? 그게 뭐죠?"     


  "당신이 인간의 삶에서 저축한 선한 행동, 행복한 추억 그리고 사랑의 기억을 수강료로 받습니다."    

 

이곳은 무료한 곳이야. 나처럼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버티기 어렵지. 배가 고프지 않으니 먹을 일도 없고 피곤하지 않으니 잠을 잘 일도 없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조차 없지. 한만오 씨에게 오디션에 주어진 시간이 인간계 시간으로 49일이라 했지. 근데 여기선 시간제한 따위는 무의미하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건 다른 의미로 오디션 도전을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는 거야. 문제는 인간의 영이 반복에 지쳐서 스스로 물러난다는 거지. 이곳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무한한 시간과 가능성이 주어지는 곳이야. 그러나 인간들은 한결같이 기한을 원했어. 끝이 나지 않는다면 열심히 달릴 수 없다면서 말이야. 인간은 불멸을 원하면서 정작 불멸이 주어지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지. 어리석은 존재들!   

  

  "어, 이 건물은 <저승의 고수들, 신의 목소리>네요."    

 

  "거긴 인간 세상의 보컬 학원이라 보시면 됩니다. 오디션에서 노래 부르고 싶으면 등록하세요. 감동적인 노래 한 곡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울릴 수도 있죠."     


  "이 많은 건물이 결국 다 학원이었네요. 저승도 이승만큼이나 치열하군요. 오디션을 봐야 하고 말이죠."


  "삶은 원래 치열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알고 보면 무료해요. 전 그래서 이승에 있는 게 더 좋아요. 길고양이로 떠돌아도요. 고양이들 속담 중에 ‘더러운 사람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있죠."

     

  "아니, 개똥밭 대신 더러운 사람인가요? 하긴 사람이 더럽기로 치면 제일 더러운 동물이죠. 자연을 파괴하기도 하고요. 아 참, 근데 여긴 똥 안 싸요? 그러고 보니 저 배가 안 고파요. 왜 이러죠? 잠도 오래 못 잔 것 같은데 전혀 졸리지도 않고요. 저 이러다 죽는 거 아니에요?"   

  

  "잊었나 본데 한만오 씨는 이미 죽었어요. 몸을 잃었죠."

    

  "아차~ 중요한 걸 깜박했군요. 제가 몸이 있는 줄 착각했지 뭐예요."  

   

  "뭐, 지금이라도 깜박하고 착각할 수 있는 걸 즐기세요. 조만간 그것조차도 잊게 될 테니까요."   

  

  "깜두 씨는 마치 도인 같아요. 아니, 도묘라고 해야 하나? 아하하~ 아무튼 깜두 씨, 저 오디션에서 뭘 할지 방금 결정했어요. 어렸을 적에 딱 한 번 유치원에서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무대 위의 배우들이 정말 멋졌죠. 그때 꿈을 꿨었어요. 내가 저 무대에 오를 수만 있다면 하고요. 전 오디션에서 뮤지컬을 선보일 거예요."     


  "좋은 선택입니다. 뮤지컬은 대사, 노래, 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으니까요. 대본도 직접 써야 하고 노래도 골라야 하고 게다가 춤까지 배우려면 아주 바쁠 거예요. 뮤지컬 배우기에 안성맞춤인 학원 하나를 소개하죠. 절 따라오세요."   

  

출처 : Unsplash의Gwen King


나는 한만오 씨에게 저승 최고의 뮤지컬 배우 양성소를 소개했지. 바로 <찰리 뮤지컬>이야. 찰리는 인간계의 시간으로 크리스마스에 선물처럼 이곳에 왔지. 인간으로 살 때 배우, 영화감독, 코미디언, 음악가로 다재다능했다더군. 저승에 와서도 아주 인기라고. 찰리가 키운 걸출한 저승 뮤지컬 배우가 많아.     


내 친구 알버트도 찰리의 애제자 중 하나야. 알버트는 유명한 물리학자였다는데, 큰 상도 타고 특수 뭐시기 이론도 연구했대. 죽은 알버트의 뇌는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나 뭐라나? 가엾은 내 친구 알버트, 쯧쯧. 잔인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어쨌든 평생 연구만 하다가 뇌까지 빼앗기고 온 알버트는 이곳을 즐기며 사는 몇 안 되는 영 중에 하나야. 주황색으로 염색한 헝클어진 머리에,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노란 형광색 가죽바지를 늘 입고 다니지. 아, 오해할까 봐 미리 얘기하는데 알버트는 축생 부서는 아니었어. 인간 세상에 이바지한 공이 커서 천상 부서에 있었지. 윤회의 고리도 당연히 한 번에 끊어냈고 말이야.     

 

다시 찰리 얘기로 돌아와서, 찰리가 인간계에 투척하고 온 유명한 말이 있어.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는 저승에서 살면서 또 기막힌 말을 투척했어. "저승은 가까이서 보면 엽기극이고, 멀리서 보면 공포극이다." 이 말에 모두가 동의했지. 저승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펼쳐지는 곳이고, 멀리서 보면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무서운 곳이라는 뜻이야. 찰리는 진정한 희극 영이야. 내가 아까 타고난 천성을 얘기했잖아. 찰리는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유머를 타고났다고. 이승이건 저승이건 유머가 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나는 <찰리 뮤지컬> 앞에서 한만오 씨에게 물었어.     


  "한만오 씨, 찰리 알죠? 인간계에서 아주 유명했는데."     

  

  "아니요. 그게 누구죠? 스마트폰이 있으면 이럴 때 검색이라도 해 볼 텐데. 근데 제가 꼭 알아야 하나요?"

    

  "아니, 인간이었으면서 찰리를 모른다고요? 한만오 씨, 정말 공부만 하고 살았어요? 어떻게 찰리를 모를 수가. 굉장히 실망이군요. 이 상태로 찰리를 바로 만날 순 없어요. 여긴 찰리에 대해 충분히 공부한 후에 다시 오기로 해요. 우선 <고차원 저승 언어 교육센터>부터 접수합시다. 제일 중요해요. 저승의 언어도 모르는 채 오디션을 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에요."   

  

  "네? 저승 언어가 따로 있어요?"     


나는 한만오 씨에게 '저승 언어 따라잡기' 책을 한 권 건넸지. 길 곳곳의 가판대에는 이 책이 비치되어 있거든. 저승살이도 언어가 중요해. 말이 안 통하면 오디션이고 뭐고 사는 것조차 힘들다고. 저승 언어 따라잡기는 3,500페이지에 달하는 벽돌 책이지. 한만오 씨는 책을 끙끙거리며 받아 들고 겨우 한 장을 펼치더니 신음하더군. 한순간에 세상을 다 잃은 듯 축 처지더니 이렇게 말했지.     


  "깜두 씨, 전 임용고시생이었습니다. 전공은 국어교육이었어요. 전 사전만 봤다 하면 치를 떨었어요. 지금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라고요."     


나는 한만오 씨에게  책을 추천한 걸 후회했지. 한만오 씨의 기나긴, 그러나 서글픈 신세 한탄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거든. 저승에 온 인간들은 모두 핑계를 무슨 훈장처럼 달고 온다니까. 여태껏 핑계 없는 인간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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