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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딧불 (1)

<고시생 한만오 이야기>

by 도란도란 Dec 31. 2024


한만오 씨는 시험이라면 질색이라더니 오디션 준비는 아주 열심이었지. 3,500페이지에 달하는 '저승 언어 따라잡기' 책을 보고는 한참이나 서글픈 신세 한탄이더니 결국에는 끝까지 다 읽어냈어. 헷갈리는 표현들은 일일이 수첩에 적어가면서 공부하더라니까. 5년 동안 쉬지 않고 고시 공부한 영혼이라 저승 언어를 누구보다 빨리 익혔지. 저 정도까진 안 해도 되는데 말이야. 일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부서는 축생률 100%를 자랑하는 악명 높은 곳이라고. 한만오 씨도 얼마 후 이승으로 돌아갈 거야. 축생이 되어서 말이지. 여기 있는 동안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한데 너무 열심이라니까.   

   

난 한만오 씨와 <고차원 저승 언어 교육 센터>에 접수하러 갔었어. 접수처에 앉아 있던 이는 깐깐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영이었지. 깐깐한 영이 말했어.     


  "이곳의 수강료는 인간의 삶에서 저축한 선한 행동 두 가지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의 기억을 읽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깐깐한 영이 한 손을 뻗어 손바닥을 쫙 펴서는 한만오 씨의 영을 어루만졌어. 곧이어 접수처 뒤의 스크린에 한만오 씨 생전 모습이 나타났지. 한눈에 봐도 고시생으로 살던 때로 보였어.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는 한겨울, 한만오 씨는 옷깃을 여미며 빠르게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는 중이었지. 계단의 중간 너른 곳에 노숙자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어. 겨울 외투도 없이 얇은 옷을 몇 겹이나 대충 껴입은 채 추위에 떨고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 가기 바빴지만 한만오 씨만은 발걸음을 멈추었어. 그러더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할머니에게 건네었지. 지갑을 열어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할머니 앞의 텅 빈 빨간 바구니 안에 넣었어. 한만오 씨의 지갑 안에는 달랑 오천 원짜리 두 장이 다였는데 말이지. 깐깐한 영이 물었어.  

   

  "겨우 만 원밖에 없으면서 가진 것의 절반인 오천 원을 노숙자에게 준 이유가 뭐죠?"     


  "전 오천 원만 있으면 두 끼는 걱정 없거든요. 그리고 할머니의 바구니는 비었으니까 제가 5천 원을 드리면 우린 공평하죠. 전 세상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한만오 씨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지. 한만오 씨는 고시 학원 바로 앞 노점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해결했어. 2,500원 하는 김치볶음밥 컵밥을 길에 서서 먹었지. 한만오 씨뿐만 아니라 많은 고시생들이 컵밥으로 식사를 해결했어. 500원만 더 주면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제육볶음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한만오 씨에게 500원은 큰돈이었어. 넉넉지 않은 살림에 수입이라곤 고생한 어머니의 얇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전부였거든. 한 푼이라도 아끼지 않을 수 없었어.       


그때였어. 스크린에 한만오 씨의 선한 행동들이 뒤섞여 여러 화면으로 분할되기 시작했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면이 연달아 나타났지. 깐깐한 영이 손길을 거두며 말했어.

     

  "선행이 어마어마하군요. 이 정도면 한만오 씨는 축생 부서가 아니라 천상 부서 직행 감입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 못내 아쉽군요. 쯧쯧!"     


  "아하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시간이 되시면 제 오디션 보러 오시겠어요? 제가 이번에 뮤지컬을 하거든요. 대본을 거의 다 썼는데 제가 봐도 뭉클해요. 전 고시 준비를 할 게 아니라 작가가 될 걸 그랬나 봐요."   

  

  "그래요? 왜 자살했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얼마나 뭉클한 사연이 있는지 보러 가죠."

    

깐깐한 영은 한만오 씨에게 오디션 할 때 미리 알려달라고 했어. 뮤지컬을 꼭 보러 가겠다며 약속까지 단단히 하더군. <고차원 저승 언어 교육 센터>에서 나온 한만오 씨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어.  

   

  "깜두 씨, 보셨죠? 벌써 관객 한 명 확보했어요. 아니, 깜두 씨를 포함하면 두 명이네요. 참, 깜두 씨는 제 오디션에 당연히 참석하는 거죠?"    

  

  "그럼요. 전 한만오 씨 담당인걸요. 오디션뿐만 아니라 심사할 때도 제가 있죠."  

    

  "네? 심사도요? 참, 제일 중요한 걸 묻지 않았어요. 대체 심사위원은 누구죠?"

    

  "아, 제가 심사를 직접 보진 않아요. 제 의견을 심사위원들에게 전달할 뿐이죠. 심사위원이 누구인지는 비밀입니다. 절대 알려줄 수 없어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일 수도 있고요."     


  "그럼 심사위원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힌트라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감동 아니면 재미?"     


  "그건 저도 모릅니다. 심사위원이 뭘 좋아할지는 한만오 씨만 알 수 있습니다. 이게 힌트라면 힌트예요."

     

  "제가 안다고요? 심사위원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뭘 좋아할지 제가 어떻게 알죠? 아무래도 깜두 씨가 수상하단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깜두 씨가 제 심사위원이죠?"

     

  "저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디션 준비의 전 과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저 최선을 다하세요. 한만오 씨!"

     

한만오 씨는 뮤지컬에서 선보일 노래 실력 향상을 위해 <저승의 고수들, 신의 목소리>에도 등록했지. 그곳에선 행복한 추억 세 가지를 수강료로 원했어. 한만오 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 세 가지를 지불했어. 한만오 씨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어. 한만오 씨의 행복한 추억들은 모두 아홉 살 이전으로 세 가족이 함께하던 때였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어머니는 돈벌이를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고 한만오 씨는 늘 혼자일 때가 많았어. 가난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도 한만오 씨는 열심히 공부했지. 자신만 바라보며 일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머니는 고시 학원 앞 노점에서 컵밥을 파셨어요. 수년간 꾸려오던 노점상을 시에서 강제 철거한 뒤에는 학원 건물 청소일을 시작하셨고요. 평생을 고생만 하시다 결국에는…."     


한만오 씨는 어머니 얘기를 하다가 울컥해선 말을 잇지 못했어. 나도 더는 물을 수 없었지. 한만오 씨의 죽음 뒤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테고, 어머니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일 거라 추측만 했지. 내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한만오 씨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어.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뮤지컬로 보세요. 깜두 씨에게도 비밀입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슬쩍 앞발을 들어 냥펀치를 건넸지. 내 발이 유난히 귀엽거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냥펀치를 날리진 않아. 한만오 씨에게만 특별히 해주고 싶었지. 나의 냥펀치에 한만오 씨가 활짝 웃더니 오른손을 가볍게 쥐어 답해 주었어.     


<찰리 뮤지컬>에서는 웬일인지 찰리가 직접 접수를 받았어. 수강료는 늘 똑같았지. 오직 사랑의 기억 하나만을 원했어. 사랑 없는 이에게는 그 무엇도 가르칠 수 없다면서 말이야. 찰리가 한만오 씨에게 말했지.     


  "사랑은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시작되지.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나? 나는 그 기억 하나만을 원한다네."     


저승에 온 뒤로 내내 해맑았던 한만오 씨는 이 물음에 선뜻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어. 한참을 대답 없이 자신의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지. 찰리는 한만오 씨의 기억을 읽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 한참 후에야 한만오 씨가 입을 열었지. 찰리와 나는 귀를 기울여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어. 연애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는 건 순 엉터리야. 한만오 씨의 연애 이야기는 재미는커녕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찰리가 말했어.    

 

  "뮤지컬의 가장 마지막에 이 이야기를 넣어야 하네. 심사위원들 모두의 눈물을 쏙 뺄 거라고, 내 장담하지. 이번에 왠지 느낌이 좋아. 축생 부서 최고의 명작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해보세!"

    

나도 한만오 씨를 응원하기로 했어. 그가 바라던 대로 윤회의 고리를 끊고 저승에서 살기를 내심 바랐지. 참담한 비극이 일상인 이곳에서 한만오 씨만은 해맑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문득, 한만오 씨와 내가 좋은 파트너가 되는 상상을 했어. 흐흐히히냐옹!     





한만오의 <금생의 마지막 오디션> 무대가 시작되었다. 뮤지컬의 제목은 '나는 반딧불' 이다. 배경으로 드리워진 스크린 위로 하염없이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한만오가 서서히 무대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곧이어 노래가 흐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한만오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잔잔하고 담담한 목소리 너머로 묻어나는 먹먹함은 미처 감추지 못했다. 노래가 이어질수록 목소리는 눈물을 머금었고 금세라도 끊어질 듯 애처로웠다. 어느 부분에선 견딜 수 없었던 깊은 슬픔을 토해내는 듯했다.  


한만오의 노래가 온 무대를 채워갈 때, 무대 아래 한편에서는 베일에 가려진 심사위원 셋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눈물을 참기라도 하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만오의 삶 이야기가 빗소리와 함께 무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Unsplash의Renaud ConfavreuxUnsplash의Renaud Confavr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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