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보내지 못한 마지막
나에게 마지막은 어떤 의미일까. 이십 대 한창이던 때에 스스로 정했던 좌우명은 ‘후회할 일은 하지 말자’였다.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마쳤을 때 마지막이 아쉬워도 그 일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때에도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다음 카페에서 소규모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호회를 검색해 가입했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궁금한 것들을 배워 나갔다. 나에게 있어서 시작은 늘 설렘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지막을 돌이켜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잘 살아가다가도 불현듯 내 마음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선택에 대해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역시 아쉬운 마지막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제는 보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피곤했다. 하지만 진짜 마지막이라며 덮어 두었다가도, 어느새 몰래 펼쳐 보곤 했다. 그렇게 덮고 펼치기를 반복한 탓에 그 부분만 유독 낡아 있다. 마치 오래된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해 귀퉁이를 접어 둔 페이지처럼. 나의 손때가 묻어버린 그 페이지를 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언제 올지 모를 그 순간을 뒤로하고, 내 앞에 있는 수많은 시작을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독서 모임에 간 날, 고민에 대한 마침표를 찍고 싶은 마음에 “내년에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를 알아보다가 그냥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자 싶어서 생각을 접었어요.”라고 가볍게 툭 말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쏟아졌다. “하고 싶은데, 왜 안 해요?”, “힘들어도 다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결국 발목 잡히는 날이 와요.” 등등. 겨우 마음먹었는데, 나의 결단을 흔들다니. “아니에요! 꼭 그곳에서만 배우는 게 배움은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재밌어서 이걸 포기할 수 없어요.”라고 맞대응했다. 하지만 또다시 내 가슴에 화살이 날아왔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으면 결국 하게 되어 있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이분들은 나를 너무나 잘 안다. 독서 모임을 시작한 지 4년 차에 접어든 우리는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나의 약한 부분도 잘 알고 있다. 모임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면서 “안 하려고 마음잡았는데 왜 저를 흔들어요.”라며 웃으며 말했는데, “하셔야죠.”라며 내 마음에 쾅쾅쾅 쐐기를 박았다.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이 무거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결국 또다시 생각의 꼬리가 길어진다.
그림책 《내가 모은 마지막 순간들》을 읽으면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의 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순간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문을 열기만 하고, 제대로 닫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그런 나에게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라며 실망 섞인 아쉬움을 내비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기에 아쉬울 게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잘 남아 있지 않는가 보다. 무언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이룬 그런 마지막. 나의 마지막은 지우다 만 글씨처럼 희미하다. 그림책에서 인상 깊었던 마지막은 ‘서두르지 않는 마지막’이었다. ‘겨울의 마지막 눈송이가 소리 없이 사뿐사뿐 날아다녀요. 눈송이는 느릿느릿 내려오다 자꾸 멈춰 서곤 해요.’ 이 문장을 곱씹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를 떠올렸다. 가볍게 내리는 눈송이는 하늘에서 곧바로 지면에 닿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옆으로 가다가, 다시 위로 가다가, 느닷없이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러고는 어느새 소리 없이 천천히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언젠가 닿을 마지막인데 뭐 그리 빨리 가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세상을 천천히 음미하던 눈송이는 조용히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쌓이지 않을 것 같던 작은 눈송이는 그렇게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마지막을 서두르지 않던 눈송이를 생각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니 ‘나는 또 두려워서 마지막을 서둘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으로 꿈틀거렸다.
+ 이야기 나눈 그림책
내가 모은 마지막 순간들(2025, 원제: Kaikki löytämäni viimeiset)
마이야 후르메 지음, 정보람 옮김, 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