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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 Apr 19. 2024

보호병동 -2

* 자살 및 자해, 보호 또는 폐쇄병동에 대한 트리거가 있으신 분들은 읽기 전 주의를 요합니다.





밝고 해가 잘 들었다. 꽤 쾌적한 병원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내 마음은 쾌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살이라는 말을 했다. 자해할 기회만 엿보았지만 병원은 도저히 자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거기 있던 다른 환우가 '나랑 약속하자, 자살이라는 말 하지 않기로.'라고 했을 정도였다.


2인실은 주의집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병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2주 좀 넘는 시간을 지냈다. 6인실도 있었는데 마지막 한 주 정도의 시간은 6인실에서 보냈다. 안정실이라는 곳도 있는데, 갑자기 액팅아웃(충동적이거나 폭력적, 자해, 타해의 위협이 있을 수도 있는 행동을 하는 것)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서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첫 주는 매일 울었다. 가족에게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면회도 가족만 올 수 있었다. 친구들도 보고 싶고 그 당시의 애인도 보고 싶고 노래가 너무 듣고 싶었다. 전자기기가 반입이 안되어서 노래도 들을 수가 없었다. 화면이 없는 미키마우스 엠피쓰리 같은 기계는 괜찮아서 가끔 그 기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엠피쓰리를 빌려 듣곤 했다.


보호병동의 하루는 별 것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밥을 먹고 약을 먹어야 한다. 아무도 예외는 없다. 약을 다 먹었는지 입을 벌리고 혀를 들어 확인했다. 오후가 되면 또 점심을 먹고 약을 먹었다. 오후시간에 보드게임을 하거나, 사이클을 타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원을 열어주는 시간이 있다. 하루에 유일하게 햇볕과 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탁구대를 설치해 주면 탁구를 칠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은 산책이랍시고 조금 넓은 직원 정원 같은 곳을 개방해 주었다. 거기서 먹었던 메로나가 내가 지금껏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 제일 맛있었다. 저녁이 되면 또 밥을 준다. 그러면 밥을 먹고 또 약을 먹는다. 저녁 일찍 잠에 든다. 새벽에 자주 깨곤 했는데, 약을 추가 요청해서 잠들곤 했다. 


면회 시간에는 엄마가 면회를 왔다. 가족 중에서도 한 명만 출입이 가능해서 아빠는 창 밖으로 나를 보곤 했었다. 내 2인실 침대 옆에는 큰 창문이 있었다. 그나마 개방된 곳 바깥이 철창으로 막혀있고, 나무로 가려져있었다. 그 틈새로 거기서 아빠가 손을 흔들어주곤 했다. 엄마는 병원에서 잘 먹을 수 없는 부드러운 카스텔라, 롤케이크 같은걸 사와 주셨다. 나는 자해를 했었기 때문에 손목에 상처나 흉터가 많았다. 그걸 엄마가 보면 속상해할 까봐, 나를 자주 봐주시던 외과의 선생님께 꼭 손목을 습윤밴드로 가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다시는 이 예쁜 손목에 그러지 않기로 하자고 밴드를 발라주시곤 했었다.


어쩌다 간호 실습 온 사람들과, 실습 온 의대생들은 우리에겐 나름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간호사 실습생들이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뭐냐고 물어보고, 퀴즈를 맞히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해 줬던 고마운 기억이 있다.


일상을 잘 보내는 줄 알았다. 그러다 결국 나는 또 일을 내는데, 나사가 박힌 틈에 손등을 세게 문질러 상처를 냈다. 왜 그랬을까? 정말 모르겠는데, 그 당시 자해를 하면 속이 시원해졌던 기억만 희미하게 있으니까... 잘 모르겠다. 그게 보호병동에서의 2주 차였다. 거기서까지 그랬어야 했을까 싶은데, 그때의 내 속은 나도 모른다. 간호사가 정말 속상하다는 듯이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상처 났잖아요. 정말..." 하시면서 나를 안정실로 데려갔다. 안정실에서 약을 투여받고 한참을 있었다. 울면서 누워있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 안 되니까 나는 열심히 병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2인실에 같이 있던 환우가 있었다. 모든 감정과 언어, 행동이 둔마 된 환자여서 말을 하지도, 어떤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누워있기 때문에 간호사가 계속 와서 자세를 바꾸라고 하면 자세를 바꿨다. 간호사가 밥을 먹으러 가라고 하면 가서 밥만 먹었다. 양치를 하거나 세수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환우의 손을 잡고 끌어내 밥을 먹으러 간다던가, 양치를 하러 간다던가, 약을 먹으러 가게 챙겨준다던가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돕기 시작하니 재미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조금 뿌듯하고 좋았다. 아마 보호사 선생님이 나의 이야기를 그분의 친언니께 했다고 했다. 언니 분이 나에게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꾸벅이셨다.


전혀 한 번을 움직이질 않는 사람이고 화장실도 가지 못 할 때가 많아 기저귀를 차는 환자였는데, 내 덕분에 조금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나야말로 감사했다.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어서. 점차 병원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에 나는 6인실로 옮겨졌다.


6인실에는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조현병 환자들이 있었는데, 한 번은 액팅아웃의 징조가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간호사실의 두꺼운 유리문을 두들겨 뭔가 조짐이 이상한 환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 환자는 허공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려 하자 내가 얼른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솔직히 환자로서는 알 바 아니지만, 나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심드렁하게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병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성폭력을 당해 소송 때문에 입원한 환우랑 친해지기도 했다. 어떤 환우에게는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 짧은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보호병동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생각해 보면 자살이라는 생각은 팝업창 같은 것이었다. 모니터에 광고 팝업창이 와다다 뜨면 나도 모르게 그 상황에 닥쳐버리게 되는 것처럼. 자살생각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떠오르는 팝업창을 잠깐 끌 수도 있고, 최소화시킬 수도 있고, 창을 작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까지는 온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빠른 호전을 보여 한 달 만에 퇴원했다. 죽었다 살아났으니 덤으로 얻은 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아주 조금 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근데 이제부터 문제인 것이었다. 이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지. 죽음만 바라보고 살던 내가 이제 살아야 하는데, 앞날이 막막하고 두려웠다. 보호병동을 나서며 엄마가 챙겨준 새하얀 신발을 신고, 아빠가 사준 유니콘 인형을 끌어안고 퇴원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나을 때까지 부모님이 나를 정서적으로 돌봐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부모님에게 돌봄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말 어떻게 살지. 일단은 치료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보호병동 1,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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